세 무녀의 이야기

2021.06.12 03:00

굿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아버지를 통해서였다. 아버지가 아직 학생이던 시절,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자 집안 어른들은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무당을 불러 집에서 굿판을 열었다. 무당은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떠난 할아버지의 넋을 기리고, 놀랍게도 할아버지가 아니면 알 수 없을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남은 가족들을 한 명씩 꼼꼼히 위로했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는 그 굿판에 할아버지가 꼭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신예슬 음악평론가

나와 1촌 관계인 아버지가 겪은 일이지만, 나는 얼마 전까지 굿은커녕 굿 비슷한 것도 볼 기회가 없었다. 가끔 또래 동료들에게 이야기를 들은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일반에게 공개되는 굿은 별로 없어서 굿판이 열린다는 소식은 주변 선생님이나 지인을 통해 제한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집안에서도 굿을 경험했지만, 나는 집중적으로 탐구하거나 직접 의뢰하지 않는 한 일상에서 굿을 경험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는 근대화 시기에 이루어졌던 그리스도교 문화의 급격한 전파와 무속신앙 타파 정책, 그리고 새마을운동 등의 여파가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다 얼마 전 처음으로 남산국악당에서 굿 공연 ‘세 자매 이야기’를 보았다. 의뢰인은 없이, 한평생을 굿판에서 보내온 세 무녀가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무대화된 굿이었다. 무대에 오른 이들은 동해안별신굿 세습무 중 부산의 김씨 무계를 이어오고 있는 세 자매, 1941년생 김영희, 1951년생 김동연, 1955년생 김동언이었다. 김영희는 부정을 물리고 조상·세존·성주신에게 굿을 고하는 굿거리인 안비나리를, 김동언은 망자를 천도하는 망자굿을, 김동연은 자식을 점지하고 수명장수하고 자손이 잘되도록 비는 세존굿을 연행했다.

청중들은 진짜 굿판에서처럼 꾸준히 굿상에 돈을 얹기도, 추임새를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굿과 굿 공연은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연행자들은 굿판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공연만 하면 너무 떨린다거나, 굿판에서는 시간 신경 안 쓰고 해도 되는데 공연이니까 제때 맞춰 끝내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공연화된 굿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잘 모르겠기도 했고, 또 영화 <만신>에서 보고 들었던 말도 떠올랐다. “무속은 자연 그대로의 것이어야 하는데 이제는 무대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무속의 순수성, 이런 것이 흐려져가고 있다고나 할까요?”라는 민속학자 김태곤의 말과, “공연이라고 해서 무엇이 안 오는 것이 아니다. 무대 생활에도 다 적응이 된다”는 만신 김금화의 말이다. 서로 다른 의견이 뇌리를 스치는 가운데 이것이 굿이라면 누구에게 어떤 효험이 있을지, 굿과 굿 공연의 차이를 얼마나 염두에 두어야 할지 등 여러 질문이 생겨났다.

그러나 세 무녀의 존재와 그들의 이야기는 이 모든 물음을 차치하게 만들었다. 평생을 굿판에서 보낸 무녀들은 세 시간 가까이 그들의 인생사를 사설로 풀어냈고, 그 서사를 하염없이 듣다 보면 어느새 악사들이 그 이야기 틈을 파고들어 노래로 이어지는 길목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굿쟁이로서 겪어왔던 설움과 안타까움을 풀어내다가도 자리에 온 사람들의 복을 빌어주었다. 말과 노래, 이야기와 음악 사이를 끝없이 오갔던 긴 연행에서 나는 굿이라는 행위의 힘을 제한된 형태로나마 느끼며, 그들의 삶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공연장을 나오며, 나는 이 경험이 어쩌면 ‘의뢰인이 부재해도 되는 굿 공연’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위해 굿을 연행해왔을 것이다. 남을 위로하고 남의 복을 빌어오느라 스스로를 잘 보듬지 못했던 자매들이 마침내 서로를 다독이는, 자신들을 위한 굿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진짜 굿판에서는 결코 듣지 못했을 너무나도 내밀한, 그리고 역사적인 삶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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