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우리를 이간질하는가

2021.06.17 03:00 입력 2021.06.17 03:02 수정

“우리는 노동 현장에서든 가정이나 침대에서든 우리가 한 노동에 걸맞은 돈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 전체는 맨움(manwom)에 대한 경제적 착취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위 문장은 여성과 남성이 정확히 반대의 위치에서 살아간다고 가정한 판타지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쓴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1977년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의 일부다. 맨움은 이 작품에서 남성을 뜻하는 고유명사이며, 소설 속 인물이 남성의 ‘독박’ 돌봄에 항의하는 대목이다. 2015년 커뮤니티 메갈리아의 이름은 이 소설에서 나왔다. 현실이 반대라고 가정한 채 쏟아진 언어들. 그제서야 한국 사회는 성차별이란 단어를 정오의 태양 아래로 소환했고, 난리가 났다. 다들 잊었나? 그다음이 처참했다. 이 시대의 마지막 가부장들이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감화되는가 싶더니, 권력은 한 톨도 내주지 않았다. 2018년 지방선거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의 얼굴이 전국 지도를 둘러싼 인포그래픽 형식으로 공개됐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중년 남성 정치인’ 젠더 표현을 적확하게 구현해 낸 얼굴들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어디 정계뿐인가? 그들은 젊은 세대가 건져낸 페미니즘 안의 분열과 차이들에 주목하지 않았다. ‘어떤’ 페미니즘이 사회 보편의 정의를 더 나은 방향으로 견인해 나가는지 질문하지 않았다. 대신 페미니즘을 싸잡아 싫다고 말하는 ‘일부’를 소환해 ‘이십 대 남성의 목소리’라며 변화를 거부하는 자신들을 방어했다.

그들은 국가가 여성으로 분류한 인구의 절반이 정규 노동시장에서 지분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사회 구조가 짜여 있는 것이 국가에 얼마만큼의 손실을 내는지조차 말하지 않는다. 남성으로 지정된 자들이 왜 젊은 날을 노동시장에 모두 써버린 뒤 식생활마저 스스로 꾸릴 수 없는 노년이 돼 지자체가 고용한 여성들이 그들의 도시락을 싸야만 하는지 따지지 않는다.

공정한 경쟁이라고? 이 경쟁의 무대는 특정한 위치의 사람이 어느 순간에만 성공하도록 짜여 있다. 이 경쟁 원리는 도박과 같아서, 누구나 순식간에 미끄러진다. 분업, 외주, 효율을 맹신하는 사회는 사람이 평생에 걸쳐 통합된 존재로 살아가는 데 적극 반대한다. 어제의 사업가, 투자 성공자였던 가부장이 내일의 알코올중독자가 되고 가정이 박살났다는 식의 서사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준석’들의 입을 빌려 계속 경쟁을 부추겨 보라. 승자의 자리를 ‘나’로 바꿔치기 위해 여성들마저 돌봄을 포기하고 있다. 약자가 짐이 되고, 자신이 쓸모없어졌다고 느끼면 가차없이 죽음을 택하는 사회. 세상은 제 손으로 아무도, 심지어 자신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 우리는 멸종 중이다.

본인이 이 명칭을 좋아하지 않겠지만, ‘이대남’에 포함되는 나의 식구는 “돈만 많이 주면 얼마든지 과로하죠.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는 직장 동료의 말에 “저는 식구들하고 정기 회의도 있고, 식사 당번도 돌아가면서 해요. 돈 많이 줘도 그건 싫어요” 했다고 한다. 우리는 공존한다. 누가 우리를 이간질하는가? 우리는 행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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