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세

2022.02.05 03:00 입력 2022.02.05 03:01 수정

막스 후퍼 슈나이더, Damaged by Miracles 전시 설치장면, 2021 ⓒMax Hooper Schneider, High Art, Paris

막스 후퍼 슈나이더, Damaged by Miracles 전시 설치장면, 2021 ⓒMax Hooper Schneider, High Art, Paris

종말은 인류처럼 지구에 기생하는 유기체의 문제이지 지구의 관심사는 아니다. 환경이 황폐해졌다고 지구가 상처 입을 일은 없다. 판게아가 갈라지고, 마그마가 분출하고, 해일이 몰아치고, 해수면의 온도가 올라간들, 지구는 끝나지 않는다. 자연재해의 이름으로 생태가 뒤집히고, 몇몇 생명체가 멸종할 뿐. 지질학적 시간을 스치고 사라지는 유기체의 일대기는 미약하다.

막스 후퍼 슈나이더는 포유류가 대륙마다 다른 양상으로 진화하고 신생대형 생물군이 크게 번성했던 시신세(始新世, Eocene epoch·약 5600만년 전~3390만년 전)의 생명을 상상했다. 원숭이는 출현했으나, 기억과 역사를 재구성하며 능숙하게 자기 존재의 당위성을 축적해 온 인류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던 이 시기에 오늘날 살아남은 대다수 동식물의 조상이 등장했단다. 티베트고원과 히말라야산맥이 탄생하고, 다양한 어류가 종족을 퍼뜨리던 시기, 지구의 기온은 북극 근처에서 악어들이 헤엄을 칠 만큼 높았다. 지구온난화를 염려하는 과학자들은 온실가스 배출 감축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시신세의 기후가 펼쳐질 것이라고 말한다. 급속한 기후변화를 견딜 수 있는 생명체가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작가는 묘지처럼 솟아오른 악어 화석 더미 위로 알루미늄 꽃을 피웠다. 박제와 화석으로 생명의 역사를 기억하고, 묘비와 박물관으로 역사를 기리는 인간 앞에서, 잎을 펼치고 접기를 반복하는 로보틱 식물은 죽음과 소멸, 탄생의 알레고리를 덧입는다. 지구의 시간 속에 기억으로 남은 것과 사라진 것들을 연상시키는 알루미늄 꽃은, 죽음이 끝이 아니며 그저 물질의 상태가 달라진 것뿐이라고, 묘지는 다음 세계를 향한 잠재력을 축적한 거름 좋은 텃밭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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