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핵무장 경우의 수는 생각보다 적다

지난 칼럼에 이어 다시 핵무장 이야기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 비핀 나랑 교수가 신년 벽두에 29개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과 포기 경로를 다각도로 분석한 책을 출간했다.400쪽에 약간 못 미치는 신간에서 나랑은 핵무기 개발 경로를 ‘헤징’(hedging) ‘속전속결’(sprinting) ‘강대국 지원’(sheltered pursuit) ‘숨기기’(hiding)로 분류했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헤징은 여차하면 핵무기 개발을 할 수도 있지만 이를 자제하고 있음을 희미하게 내보이는 책략이다. 농축 또는 재처리를 통해 핵무기급 물질은 아닌 핵분열성물질만 확보하고 핵무기화, 발사시스템, 핵무기 운용 체제 등은 갖추지 않은 상태가 헤징이다. 여기에다 헤징에는 핵무기 개발의 이론 작업, 핵주기의 자체적 통제, 핵무기급 물질 생산능력 확보, 이중용도 발사시스템 작업 등도 포함한다. 헤징은 따라서 핵무기 레이스에 언제라도 뛰어들 수 있음을 미리 밝혀두는 워밍업이자, 적대국 또는 비협조적 태도를 보이는 동맹국에 나를 더 이상 건들지 말라는 최후통첩이기도 하다.

속전속결 사례는 국제사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핵보유국들인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에다 사실상의 핵보유국인 인도까지 포함해서 여섯 나라이다. 이들 국가 모두 애당초 핵무기 개발 의지가 확고해서 독자적으로 최대한 빨리 핵무기 개발에 돌입, 결승선을 통과한 경우다. 핵잠수함까지 보유하고 있는 이 국가들은 핵무기 개발 관련 연구와 시설들을 전술적으로 모호하게 하면서도 핵무기 개발 의도와 능력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군사용 농축과 재처리 작업, 그리고 핵무기 운용에 필요한 미사일 관리와 여타 통상적 활동 등도 공개적으로 했다. 누가 봐도 노골적인 핵무기 개발이었다.

이스라엘, 파키스탄 그리고 북한은 미국, 러시아, 중국 등 강대국의 보호 내지 후원으로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국가들이다. 이해관계가 얽힌 강대국들의 전략적 ‘관용’ 탓에 이들 세 나라는 각자 핵무기 개발을 은밀히 추진하면서도 경제 제재 내지 군사적 보복을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됐다. 오히려 강대국들이 변심을 할까 우려하여 최대한 서둘러 핵무기 개발에 전력투구하여 대업을 이뤘다.

숨기기는 ‘고위험, 고수익’ 전략이다. 이 전략으로 핵무기를 확보할 경우 국가안보에 막대한 이익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어느 국가가 기왕에 핵무기를 보유했다면 국제사회도 그 국가의 핵무기 실재(實在)를 수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핵무기 개발 완성 전에 발각되면 그 피해는 재앙 수준이다. 게다가 숨기기는 수년에 걸쳐 유지돼야 성공할 수 있으므로 그 가능성은 아주 낮다.

미국의 핵우산이 역내에서 역외로 옮겨간 지 오래이며, 국내 핵무장 여론까지 높아지는 추세이다. 핵무장을 찬성하는 목소리는 불확실성 시대가 낳은 가장 투명한 증상이다. 내가 아는 원자력·핵비확산 전문가들 중에 핵무기만 갖고 있으면 모든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것이라는 토템의 힘을 인디언 추장처럼 신봉하는 이가 있다. 나는 그 믿음을 미심쩍은 부적쯤으로 여기지만 절대무기에 대한 주술적 맹신이 실은 오래전부터 꽃가루처럼 주변에 퍼져 있기는 하다.

‘보고번호 제48호’는 박정희 정권 시절 핵무기 개발을 총지휘했던 오원철 경제2 수석비서관이 1972년 9월8일 박 대통령에게 핵무기개발 계획을 입안하여 보고한 2급 비밀 문서번호이다. 50년이 된 이 문서의 원본은 행방불명이 되었지만 한국이 섀도복싱을 하는 고독한 인파이터인 것만은 분명하다. 북한의 자발적 비핵화가 불가능으로 최종 판명이 나면 정책서클에서는 네 가지 경로들의 전략적 장단점을 고려하여 핵무장 경로 매트릭스를 구성해야 할 것이다. 매 지점을 통과하는 속도까지를 감안한 절제된 국가핵안보전략을 작성해야 하는 임무를 차기 정부가 떠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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