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작가는 평화의 섬 제주가 좋아서 이주했다는 말을 강연 중에 100여번은 뱉었다.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하는 좋은 사람들과 다정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부단히 강조했다. 알고보니 같은 동네 주민이었고 인연이 되어 잡담할 기회가 생겼다. 4·3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토벌대가 서너 살 아이의 다리를 잡아 바위에 메쳐 죽게 했다’는 생존자의 증언이 있는 빌레못동굴이 근처에 있다, 뭐 그런. 하지만 평화의 섬 제주를 사랑한다는 다정한 이의 대답은 날카로웠다. “왜 어두운 이야기만 해요?”
종종 마주하는 풍경이다. 부모가 돌아가며 그림과 악기를 가르치는 그룹에서, 나는 독서토론을 하곤 했다. 제주에 살지만 제주의 역사를 잘 모르는 육지 사람들, 게다가 아이들에게 4·3은 매우 바람직한 소재였다. 하지만 항상 긍정적인 자세로 공부하며 다정하게 사람을 대한다는 보호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왜 부정적인 이야기만 해요?”
제주를 평화의 섬이라고 일컫는 건, 절망의 역사를 지녔기 때문이다. 1271년, 결사항전을 위해 제주로 들어온 삼별초가 시작이었다. 끌려가 토성과 돌성을 쌓았던 제주인들은 여몽연합군의 삼별초 제압(1273년) 이후 원나라 직속 지배를 받다가 ‘고려판 4·3 학살’로 불리는 목호의 난(1374년) 당시 떼죽음을 당한다. 전함 314척을 끌고 온 최영 장군은 몽골사람들과 협력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섬사람의 운명을 이해하지 않았다. 제주는 동네북이 되었고 세금 바치는 게 힘들어 자꾸만 사람들이 섬을 떠나자 인조는 출륙 금지령을 내리는데(1629년), 무려 200년간 지속된다.
일제강점기에는 비행장, 격납고, 진지동굴을 만들었다. 4·3이 발생하자, 가족과 사는 곳을 잃는다. 중산간 지역의 마을이나 사찰을 가보면 ‘4·3 때 다 전소’라는 설명이 예외 없이 적혀 있는 이유다. 평범한 산책길 옆이나 도심 한가운데서도 유적지 팻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내용은 단순하다. ‘여기서 민간인 수백 명 학살.’ 6·25가 발발하자, 국군은 예비검속으로 죄 없는 사람들 수백 명을 끌고 가 처형하고 매장한 후 은폐한다. 6년이 지나서야 유해를 찾은 유족들은 누구의 뼈인지 알 수 없는 슬픔을 백조일손(百祖一孫)이란 말로 세상에 남긴다. 100여 명의 사람이 한날한시에 죽어 서로 엉켜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무덤도 같고 제사도 같이 치르기에 그 자손은 하나라니, 결코 기뻐하며 읽을 수 없다.
절망의 역사는 이념의 과잉이 원인이기에 쉽게 공론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평화라는 말 아래에서라도 그렇다면 의아하다. 제주예찬을 마다하지 않는 공간에서도 찬밥 대우라면 황당하다. 그 작가에게 평화란, 조용하고 공기 좋은 시골동네였다. 그 모임에서 긍정이라는 건, 비판적인 접근을 싫어하는 거에 불과했다. 문제없는 말들만 오가니 서로는 늘 아껴준다. 다정함의 민낯, 긍정의 배신, 친절함의 역공이다. 이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밑도 끝도 없이 좋은 단어만 나열하면, 필시 무엇을 짓누른다. 다정한 사람이 좋다. 그래서 다정한 글쓰기가 좋다는 식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 이야기하자, 장점만 말하자, 비판적으로 글 쓰는 건 도움이 안 된다, 꼭 저런 말을 해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해야 하냐 등으로 확대된다. 제주만의 모습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