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역사는 약 45억년. 그중 4억5000만년 전, 따뜻한 바닷속에 오스트러코덤(ostracoderms)이라는 턱과 이빨이 없는 물고기가 살았다. 등뼈를 가진 동물로는 가장 오래된 생물이다. 인간의 귀는 이 원시 어류의 평형기관에서 진화했다. 귀는 남성의 성기와 함께 인간의 인체에서 가장 부드러운 조직이다. 미생물에게 좋은 먹을거리다. 자본주의 출현 이후 최악의 종(種)이 된 인간이 지구에 속죄하는 방식은 단 하나, 미생물의 도움을 받아 흙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귀는 물리적으로 엷고, ‘부화뇌동(附和雷同)’에 귀는 없지만 “귀가 얇다”는 의미다. 하지만 귀는 약하지도 수동적이지도 않다. 머리, 손발, 눈 등 신체 부위는 상징적이다. 청각 ‘장애인’들은 자신의 상태를 장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농인은 장애가 아니라 정체성이다. 농인 사이에 청인이 태어나면, 실망하는 농인 부모들도 있다. 자녀가 자신의 커뮤니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어(手語)는 정확한 언어다. 외국어도 있고 방언도 있다. 시각 장애인이 손으로 읽고 보는 것처럼 들리지 않음은 장애가 아니라 다른 형태의 삶이다. 탈식민! 나를 억압하는 소리는 안 들으면 ‘그만이다’.
요즘 많이 사용하는 ‘융합’의 정확한 뜻은 통섭(通攝)이다. 동음이의어인 통섭(統攝)과는 정반대 뜻이니 주의해야 한다. 한자는 상형문자라 생긴 모양대로 의미를 드러낸다. 섭(攝)은 손(手)이 하나, 귀(耳) 세 개로 이루어진 흥미로운 글자이다. 나의 무지를 감안하고 말한다면, 인체의 부분으로만 이루어진 한자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신체 부분도 아니고 아예 사람(여성) 셋을 모아 놓은 ‘간(姦·간교하다, 옳지 않다)’은 문명의 여성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청(聽)’이 있지만 듣기를 상징하는 말은 ‘귀’다. 귀가 셋일 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기존 의미인, 사람들이 모여 소곤거리니 이를 손으로 잡아 끌어내야 한다는 통제의 뜻이다. ‘다스리다(섭)’ ‘유지하다(섭)’ 등이 그것이다. 섭리, 섭취, 섭생, 포섭, 간섭, 섭정(攝政)… 음역으로도 흥미롭다. 스웨덴어에서 유래한 온도를 표시하는 눈금 명칭인 ‘℃’의 표음어가 ‘섭씨(攝氏)’이다.
귀가 셋, 왜 통섭(通攝)인가
통치의 관점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 생각해보자. 섭을 “듣는 귀가 많다”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 “당신의 말을 우리가 듣고 있다”는 의미로 보면 어떨까. 나는 대화로 해결되는 세상사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 몸의 개별성으로 인해 우리는 타인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없고, 무엇보다 듣는 자와 말하는 자의 위치, 이해관계가 같은 경우는 없다. 대화나 소통은 지향이지, 실현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는 말하기는 사회적 인간 특히 리더의 기본 조건이다. 말하기와 듣기는 삶 그 자체다.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말하기는 타인의 몸(귀)을 짓밟는 폭력이다. 더구나 약자를 무시하기로 작정한 의도적인 막말은 공동체의 영혼을 붕괴시킨다.
이런 말하기 방식을 정치인이 주도한다면, 유감을 넘어 절망이다. 태영호 의원(국민의힘)의 “제주 4·3 북한 지시” 발언은 무지일까, 의지일까, 악의일까.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두고 “나라 구하다 죽었냐, 시체 장사” 운운한 김미나 국민의힘 창원시의원(비례)의 행동은 ‘평범한’ 사상자에게도 할 수 없는 언행이다. 그래도 이 두 경우는, 청자를 상정하고 있어서 그나마 ‘말이 된다’.
‘한겨레21’의 배지현 기자는 윤석열 대통령의 연초 각 부처 업무보고에서의 발언을, “난수표·안 들림·뜬금포”로 요약했다. 평소에도 그렇다. 이런 말하기를 바람직하다고 할 사람은 없다. 더구나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인에게 소통, 연설 능력은 필수적이다. ‘난수표·안 들림·뜬금포’는 듣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망언보다 더 위험하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게 말하면, 책임에서 자유롭다. 듣는 이들은 화자(대통령)를 포기하게 된다. 기대가 없는 지도자처럼 행운아는 없다. 윤석열 대통령의 말은 혼자 부르는 노래다. 윤 대통령은 표독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그렇다고 그가 덕장이나 지장 스타일이 아님은 분명해서, 그의 말은 뭔가 ‘모자란 사람’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낸다.
반면 그와 그 주변인들은, 국민은 물론 동료 정치인들의 중구난방(衆口難防)은 철저히 무시한다. 중구난방은 동시에 쏟아내는 여러 사람의 말은 막기 어렵다는, 민의의 의미를 정확하게 표현한 단어다. 여기서 중요한 요소는 “동시에”다. 여러 사람의 동시 발언은 중요한 여론이다. 윤 정권의 가장 큰 특징은 표의(表意)를 상실한 “자유, 안보, 불법, 엄단” 같은 소리만 난무하는, 말 없는 정부라는 점이다.
이명을 발생시키는 대통령의 말
횡설수설(橫說竪說)은 중구난방만큼이나 오해된 말이다. 통섭의 의미에 가장 가깝다. 횡설수설은 창조와 가능성의 시작이다. 횡(橫)은 가로, 수(竪)는 세우다, 서다라는 뜻. 가로와 세로는 공간에서 조우한다. 기존의 언어가 평범한 선이라면, 횡설과 수설은 가로선과 세로선이 만날 때 점(點)의 위치와 말하는 자의 장소와 맥락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아름다움이 더하는 음악의 크로스오버가 좋은 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것들의 교차, 교직된 제 3의 화음이 횡설수설이다.
글쓰기가 업인 나는 입체적 말하기 방식인 횡설수설을 위해 노력한다. 나의 횡설수설을 상대방이 알아들었다면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 이심전심(以心傳心)처럼 생각의 스침이 발생시키는 쾌락을 나눌 수 있다. 사람들이 ‘인문학’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이런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 즐거움은 인간의 조건이다. 못 알아들었다면, 말하는 자의 완벽한 승리. 당사자는 즐겁고, 세상을 이롭게 한다. 모든 말을 다 알아듣는 인생은 없으므로 공부하게 된다.
타인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경우, 두 가지 대응이 있다. 알려고 노력하거나 방어하거나. 알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바람직함은 말할 것도 없다. 방어는 새로운 앎을 억압한다. 개인도 사회도 성장할 수 없다. 지금 한국 사회는 진영 논리에 묶여 있다. 진영 논리는 국가보안법보다 훨씬 일상적이고 세련된 방어다. 옳고 그름을 다루기 이전의 대화 불능 상태임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정의를 행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횡설수설의 전제는 발화자 자신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이를 전략적으로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윤 대통령의 횡설수설은 무엇이 ‘횡’이고 무엇이 ‘수’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화자도 청자도 알 수 없는 그의 트레이드마크, 불통이다. 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권력자가 가장 무섭다.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피해와 가해, 진실 여부가 조작되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씨의 말은 상대적으로 맥락이 있다. 그는 남성들에게 “제가 동생이네요” “오빠네요”처럼 성별화된 언어를 즐겨 쓴다. 무슨 말인지 파악이 된다는 점에서는 낫지만(?), 그녀는 정치인이 아니므로 공적 발언을 삼가야 한다.
외로움은 정의하기 어려운 상태지만, 분명한 것은 혼자임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혼자라도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신앙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방의 존재는 폭력적 상황. 감정노동과 오해의 연속이다. 이때의 절망은 외로움을 넘어, 삶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울증의 신체화 증상 중 하나인 이명(耳鳴)은 특정한 질환이 아니라 귀에서 들리는 소음에 대한 ‘주관적 느낌’이다. 외부에서 청각적 자극이 없는데도 소리가 들린다고 느끼는 상태다. 소리의 크기는 작은 울림부터 항공기가 이륙할 때 내는 굉음까지 다양하다.
이명은 소통되지 않는 고통이다. 윤 대통령의 소리는 듣는 사람들에게 우울증, 진짜 이명을 불러일으킨다. 말이 생각의 표현이라면, 윤 대통령은 생각이 없다. 신문을 읽어야 하는 나는 괴롭다. 귀가 아프니 눈도 아프고 오식(誤識)도 잦다. 며칠 전 “정진석, 윤 대통령 공경…”이라는 기사를 보고 기겁했는데, 종이가 겹쳐 잘못 읽은 것이었다.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이 한 말은 “윤 대통령을 공격하면 즉각 제재”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