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가치를 먼저 증명하자

2023.02.24 03:00 입력 2023.02.24 03:04 수정

정말이지 고통스럽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아이들 동화에만 나오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지난 1년, 대통령 부부의 기행과 정제되지 않은 언행들을 일일이 다 기억하기도 쉽지 않다. 그 수준과 내용이 해명은커녕 논란으로 삼기에도 저급한 것이어서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다. 가끔은 박근혜 때가 낫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한때 트럼프 대통령을 보면서 ‘미국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하고 남 얘기 하듯 했던 그 벌을 이제 받는 모양이다.

이관후 정치학자

이관후 정치학자

민주화는 덜 되었을지언정 정치가 지금보다 정상인 때가 있었다. 아무리 보수언론이나 정치인들도 창피한 것은 창피한 줄 알고, 말이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할 때가 있었다. ‘에이, 그게 무슨 변명이 되나!’라는 양심이 그때는 있었다. 중대한 일이 생기면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날 줄을 알고, 국민 앞에서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여당의 전당대회는 차라리 ‘지명대회’라고 불러야 맞다는 말을 듣는다.

한때 ‘뭐만 하면 노무현 탓’이라고, 대통령 욕이 국민 스포츠였던 적이 있었다. 심지어 당사자인 대통령도 국민이 어디든 탓을 하고 싶다면 그런 역할이라도 해야 한다고 받아들이기도 했다. 저녁 술자리에서는 응당 정치인들을 안주거리로 삼고 온 국민이 정치평론가를 자처했다. 요즘은 아니다. 사람들은 이제 누구 탓도, 정치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말해야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해넘이를 하는 연말 연초에 우리는 정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정치는 이제 혐오를 넘어 무관심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벽에 대고 욕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를 이제야 깨닫는다. 그래서 요즘에 드는 생각은 ‘무관심을 자아내는 것도 하나의 정치 전술일까’ 하는 것이다. 실로 정치를 욕하던 때가 그립다.

이 상황이 고통스러운 또 하나의 이유는 야당의 상황이라고 별로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당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아니다. 국정지지율을 보면 윤석열 정부를 마땅하게 여기는 국민은 많지 않다. 윤 정부의 사법적 잣대가 공정하다고 느끼는 국민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야당의 지지율이 그 두 배는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도통 요지부동이다. 엊그제는 여당에 뒤진 여론조사 결과가 표본이 잘못되었고 전당대회 컨벤션 효과 때문이라는 해명을 했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다. 야당 말대로 정부와 여당이 저 모양 저 꼴이고 야당 탄압에 국민이 공분하고 있다면, 민주당의 지지율은 왜 쭉쭉 올라가지 않느냐는 것이다.

민주화 세력은 과거 독재세력과 싸울 때 참 멋진 명분을 가졌다. 독재정권이 북한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겠다고 말한다면, 우선 그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의 나라여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지금은 국민들이 묻고 있다. ‘야당이 탄압을 받는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국민이 야당을 지켜주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이다.

지난 1년여, 우리 국민들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서 살았다. 정부가 국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정부를 걱정하며 살았다. 그렇다면 야당은 폭풍우 속의 등대처럼 국민의 희망이 되어야 했다. 과연 그랬는가? 외교 실정, 경제 무능, 이태원 참사가 이어질 때, 야당은 국회 다수당으로서 또 수권정당으로서, 정부의 실정을 메우겠다는 비상한 책임감으로 ‘그림자 내각’이라도 꾸렸어야 한다. 그런데 야당도 국민을 걱정하기보다는 국민이 야당을 걱정해주기를 원했다.

야당이라 민생을 챙기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민주당은 더 개혁적이고 민주적인 정당이기라도 한가? 선거법 개정 의제를 먼저 꺼내놓고도 1년 내내 허송세월을 하다가 대통령에게 선수를 얻어맞았다. 여당이 ‘윤심’을 강조하면서 원하는 당대표를 세우는데 1년을 다 쓸 지경이지만, 야당이라고 원팀만 강조하는 것이 국민들 보기에 얼마나 다르게 보일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세대교체에 대해서는 더욱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기후위기 대응이나 연금개혁, 저출생·고령화 같은 시대적 의제를 먼저 끌고 가는 것도 아니다. 정부 비판이 야당의 역할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에서 윤 정부가 뭘 잘못하는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있나.

다시 묻자. 우리 국민들이 왜 정치혐오를 넘어 무관심으로 가고 있을까? 야당이 탄압받는지는 알겠는데, 왜 지지율은 안 올라갈까? 야당은 공세에 대응하기만도 벅차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국민들은 동의하는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는 생각을 바꿔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존재의 가치를 먼저 증명하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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