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악령’이라는 이름의 저주

2001.08.08 20:05

언론개혁’ 공방을 두고 벌어지는 극심한 편가르기와 분열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여야는 말할 것도 없고 지식인, 문인, 시민단체, 법조, 종교단체, 네티즌에 이르기까지 감정대결로 치달아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마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이 많다. 가장 염려하는 것은 아마도 양 진영이 공론의 장에서 구사하는 언어폭력일 것이다.

‘악령’ ‘홍위병’ ‘극좌동맹’ ‘대중선동주의’ 등이 ‘언론탄압’을 주창하는 측의 수사이다. 그 중에서도 단연 서슴없는 것은 이문열씨가 현 상황을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나치의 대국민 선전선동’에 비유한 것일 터이다. 이에 호응해 유석춘 교수가 ‘악령들의 문화혁명’으로 반격하며 ‘못 먹는 감 찔러나보자’식의 ‘막가파식’ 개혁을 비난한 것이 그 뒤를 잇는다.

늘 느끼는 바이지만 이들은 개인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철저히 부정한다. 5공 시절 공안검사들의 관점과 똑같이 누가 누구의 조종을 받아 움직이는 것으로 단정한다. 이들은 시민운동을 동원 체제로 파악한다. 이러한 악의적이고 공격적인 동기유발에 대해 개혁진영은 방어적일 수밖에 없다. 키워드도 ‘곡학아세’ ‘특권층동맹’ ‘반민족적 정치공작’ ‘웬 자유?’ 등이다.

극단적이기는 누가 봐도 ‘악령’파가 앞선다. ‘악령’은 오늘 느닷없이 불거진 말이 아니다. 이문열씨는 1990년대 중반에 ‘악령’과 관련해 두 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달아난 악령’과 ‘사로잡힌 악령’이 그것이다. 전자는 전교조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의식화 교육을 받은 딸의 일탈과 고통을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관점으로, 후자는 유신 치하에 권력의 간섭이 싫어서 법복을 벗은 인권변호사의 구술로 일관하는데, 두 편 모두 운동권과 저항시인의 ‘휘황한 빛을 뿜는 반독재의 대의’ 장막에 가려진 ‘거짓, 뻔뻔스러움, 천박, 비열’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다.

그는 80년대 피투성이 저항이 융융했던 ‘그 시대에 대한 끈질긴 악의’를 멈추지 않는다. 문학의 의상을 걸치고 처참하게 모독하고 있다. 소설의 형식을 빌려 그는 운동권 ‘악령’들을 징치하고자 하는 적개심을 불태운다. 그러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그는 악령들이 달아나거나 스스로 거대한 악에 갇혀버렸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사로잡힌 것은 운동권이나 저항시인이 아니라 이문열 자신이다. ‘작가의 말’에서 고백한 대로 ‘내 주제를 담기에 적합한 인물을 만들어’ 갔을 뿐 전교조에도 저항시인들 중에도 이문열이 창조한 ‘악령’은 없다.

다만 이기심이 부족한 미련한 바보들과 세상의 장삼이사(張三李四)와 다름없이 여러 결점을 지닌 사람이 있을 뿐이다. 바로 내 눈앞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줄 알면서도 계엄군에 맞서 새벽의 총성에 산화해간 미련한 자는 있을지언정 이문열이 말하는 ‘미친 개’는 없다.

이문열은 작가의 분신인 화자의 입을 빌려 ‘어떻게 우익폭력이 생겨나는지 속속들이 이해했다’면서 ‘법이 너를 처벌하지 못하니까 내가 한다’고 웅변하는데 그 역시 사실에서 어긋난다. 80년대에는 법치가 너무도 확고하고 섬세했기에 1만여명의 ‘악령’들이 감옥행을 했으며 그도 모자라 꽃다운 젊음들이 스스로 낙화처럼 붉게 떨어져 갔다.

이문열은 왜 이다지도 ‘이름도 명예도 없이’ 쇠퇴해 버린 운동권을 향해 적의를 곧추세우는가. 필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의 아름다운 문장까지 이제는 슬픔으로 다가온다. 그 ‘탐미’의 당의정 속에 숨은 독기가 역사의 비판을 받을 날이 주제넘게시리도 진정으로 염려스럽다. 문학성과 대중성의 행복한 만남도 흔한 일이 아니려니와 무엇보다 작가는 문화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관용’의 미덕이 살아 숨쉬는 사회는 성숙한 사회이다.

〈유시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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