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판의 선진국 콤플렉스

2007.07.02 17:59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선진국’이라는 구호가 정치판에 넘쳐 나고 있다. 여기에는 여권, 야권 구분이 없다. 다른 나라에는 찾아 볼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야당인 한나라당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이른바 ‘7·4·7 구상’으로 10년 내 7대 강국 진입을 외치고 있다. 또 박근혜 전 대표는 ‘줄·푸·세’ 공약을 통해 5년 내에 우리나라를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범여권도 마찬가지다. 범여권의 선두주자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는 조직부터 ‘선진평화연대’란 이름으로 무장했다. 친노 후보인 이해찬 전 총리는 ‘21세기 선진국 도약론’을 내세우고 있다. 1960~1970년 대 군사정권의 ‘근대화’ 구호에 저항했던 범여권 후보들마저 근대화의 아들이나 손자뻘쯤 되는 선진국에 목을 메고 있는 현상은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대선주자들이 집단적으로 선진국 콤플렉스에 걸린 듯하다.

도대체 선진국이 무엇이기에 모두들 선진국을 외치고 있는 것일까. ‘선진(先進)’이란 말은 논어(論語)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공자는 선진편에서 “선진의 예와 악은 야인(일반 백성)이고 지금 선비의 예와 악은 군자”라면서 그러나 “예악을 쓴다면 선진을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공자가 이때 사용한 선진은 ‘선배’와 같은 뜻으로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선진국의 선진과 거리가 있다.

-열등감 부추겨 이득노린 속셈-

선진이란 말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선진국이란 단어로 거듭났는지 모르지만 국제적으로 통일된 개념은 없다. 세계은행의 경우 1인당 국민소득에 초점을 맞추어 9206달러(2001년 기준) 이상 국가를 선진국의 뜻과 비슷한 ‘고소득 국가’로 분류하고 있다. 최근에는 경제지표뿐 아니라 사회지표, 문화지표 등을 기준으로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높아 선진국의 객관적 기준은 완전히 안개 속에 있다.

시계를 잠시 돌려보자. 1994년 11월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렸다. 우리나라는 회의 직전까지 선진국으로 분류되었으나 막판에 가까스로 개도국으로 인정받아 무역자유화 목표연도를 선진국보다 10년 늦은 2020년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많은 나라들은 한국의 개도국 주장에 불만을 표시했다. 1997년 교토기후협약 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대선 후보들이 일제히 선진국 진입을 공약하고 있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보는 시각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올해 선거판에서 왜 선진국이라는 구호가 난무하고 있을까. 과연 선진국 진입이 시대정신인가. 아무래도 상상력 빈곤 때문에 대선주자들이 개념도 불분명한, 그리고 1980년대 중반부터 집권세력의 정치 구호가 되어온 선진국이라는 단어를 계속 우려먹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국민들에게 선진국 사람이 아니라는 열등감을 불러 일으켜 이를 이용하겠다는 얄팍한 계산에서 말이다.

물론 우리 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선 부족한 요소들이 많다. 복지나 환경은 물론이고 빈부격차 문제 해결 등이 시급하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선 주자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선진국도 특정 사안에서는 후진적 요소를 갖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허울뿐인 정치 구호로 해결되지 않는다. 대선 주자들이 스스로 선진국 콤플렉스를 졸업해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산뜻한 구호를 제시할 때가 됐다.

-희망주는 산뜻한 구호 제시를-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덧붙여야겠다. 지난주 국정홍보처에서 발간하는 ‘코리아 플러스’라는 격주간지를 받았다. 취재지원 선진화방안을 마련한 정부 ‘부처답게’ 하얀 종이에 컬러로 인쇄된 책자가 겉보기에도 제법 돈이 들어갔음직해 보였다. 그렇지만 국민이 낸 세금으로 만든 책이라고 생각하니 책장을 넘길 마음이 전혀 나지 않았다. 어디 국정홍보처뿐이겠는가. 중앙부처는 물론 지방자치단체들은 홍보용 신문이나 잡지, 보고서들을 인쇄하는 데 번지르르한 최고급 종이를 사용하는 예가 허다하다. 자신들의 업적을 선전하기 위해 세금을 펑펑 쓰는 모습이 꼴같지 않다. 정부가 늘 예로 드는 선진국들은 정부가 재생 용지를 사용하는 데 앞장을 서고 있다. 국민 세금도 세금이지만 환경을 생각해서다. 정부부터 선진 의식을 제대로 가져야겠다.

〈이승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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