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구속으로 끝난, 박근혜 정치인생

2017.03.10 21:51 입력 2017.03.31 11:48 수정

박근혜 전 대통령의 19년 정치인생이 31일 새벽 법정구속으로 막을 내렸다. 헌정 사상 최대의 국정농단 스캔들로, 지난 10일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이 내려진 이후 21일만이다. 헌정 사상 처음 탄핵당한 대통령이자, 임기를 채우지 못한 두 번째 대통령, 세번째 구속된 대통령으로 남게 됐다. ‘비선 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추락을 촉발했지만, 실상 그간의 역주행과 일방통치에 민심의 반감이 폭발한 것이 박 전 대통령의 추락을 불렀다는 분석이 나온다.

애초부터 박 전 대통령 부상이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존재에 힘입었고, 아버지의 통치 스타일을 적극 차용했다는 점에서 그의 몰락은 ‘박정희 패러다임’의 종말로도 여겨진다. 18년간 독재했던 부친이 비극적 최후를 맞은 데 이어, 2대에 걸쳐 파국을 맞은 것이다.

■영애에서 18년 은둔생활까지

박 전 대통령은 6·25전쟁 때인 1952년 2월2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1963년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청와대에 들어갔다. 성심여중 2학년 때 영애(令愛)가 되면서 외부와 단절된 삶이 시작됐다. 1974년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지만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8·15 광복절 기념식 행사 도중 문세광의 총탄에 숨지면서 6개월 만에 귀국했다. 이때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만 22세였다.

그즈음 최순실 아버지 최태민이 접근했다. 무당인 최태민은 육 여사를 꿈에 봤다면서 박 전 대통령을 현혹했고, 이때 박 전 대통령과 최씨 일가의 40년 인연이 시작됐다. 최태민은 구국여성봉사단, 새마음봉사단 총재 등을 지내면서 대통령 딸과의 친분을 앞세워 호가호위했다.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는 최태민이 기업들에 기부금을 걷고 정부 부처 이권개입을 했다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정희는 1977년 딸과 최태민, 김재규를 한자리에 불러모아 최태민 비리를 추궁했다. 당시 수사자료에는 총 44건, 3억1700만원(현재 약 50억원)에 달하는 비리 사실들이 적시됐다. 당시 박정희는 ‘구국여성봉사단 해체’ ‘접근금지 조치’ 등을 지시했지만, 울면서 최태민의 결백을 주장하는 딸을 당할 수 없었다.

결국 대통령 딸과 최태민의 관계는 1979년 10월26일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 이유로도 작용했다.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국민들의 원성이 되어왔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며 최태민과 박 전 대통령 관계를 원인으로 꼽기도 했다.

아버지 살해 이후 박 전 대통령은 세상과 단절됐다. 1979년 11월21일 두 동생 근령, 지만씨와 함께 서울 신당동 옛집으로 돌아간 뒤 1998년 정계 입문까지 18년간 칩거했다. 육영재단 이사장, 영남대 재단 이사장, 정수장학회 이사장 등으로 활동했지만 공개 활동은 자제했다. 당시 일기 등이 에세이집으로 발간됐는데, ‘배신’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아버지 죽음 이후 등 돌린 지인들을 겨냥한 것이다. 최씨 일가는 이 시기에 박 대통령 주변을 챙기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1990년에는 근령, 지만씨가 노태우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 “누나(언니)가 최태민에게 속고 있으니 구해달라”고 호소했을 정도다.

■정치 입문 후 대통령 당선까지

박 전 대통령은 1998년 4월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은둔생활을 벗어났다. 정치 이력의 시작부터 최순실과 전남편 정윤회씨 등 최태민 일가 도움을 받았고,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등 문고리 3인방도 그들이 발탁했다. 그는 정계 입문 2년 만인 2000년 한나라당 부총재로 선출됐고, 이회창 총재의 독선적 당 운영을 비판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넓혔다.

2002년 2월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지만 지지도가 오르지 않자, 2002년 12월 대선 직전 복당했다. 대선 패배 후 한나라당은 차떼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난 데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을 밀어붙여 바닥으로 떨어졌다. 2004년 3월 대표로 추대된 그는 당을 ‘천막당사’로 옮기고, 전국을 돌면서 선거유세를 했다. 참패가 예상됐던 한나라당은 121석을 얻었고, 그에게는 ‘선거의 여왕’ ‘보수의 대안’이란 호칭이 붙었다.

한나라당 대표 시절엔 열린우리당이 2005년 사학법 개정안을 통과시키자 3개월 장외투쟁 끝에 재개정을 끌어냈다. 노 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을 거절하면서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말한 것은 지금도 회자된다. 2006년 6월 지방선거 유세 때 커터칼 피습을 당하면서도 선거 승리를 이끌었다. 당시 최씨가 병원을 지켰지만,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2007년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패했다. 당시 후보 검증 과정에서 최태민 일가 관련 의혹이 제기됐지만, 그는 연관성을 부인했다.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친이계의 친박 공천학살이 벌어지자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고 강력 반발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가 2010년 6월 세종시 수정안을 통과시키려 하자 부결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실정으로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은 2011년 12월 그에게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겼다.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2012년 19대 총선에서 예상 밖 승리(152석)를 끌어냈다. 당시 ‘경제민주화’ 어젠다를 선점하면서 중도로 외연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그 여세를 몰아 2012년 12월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계 입문 14년 만이다. 박 대통령 본인에겐 34년 만의 청와대 귀환이었다.

■아버지 그늘에 머문 박근혜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권력을 잡은 뒤 돌변했다. 공약인 ‘100% 국민대통합’은 없던 일이 됐다. 문화예술계에 대한 광범위한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것이 대표적이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등 국가적 위기 상황에선 번번이 편가르기로 대응했다. 무능도 두드러졌다. 2016년 4월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 동안 특별한 지시도 하지 않았다.

7시간 행적은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무능은 2015년 6월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대처 실패 등에서 다시 확인됐다.

박 전 대통령은 아버지 시대의 인맥을 기반 삼아 역주행했다.

유신독재체제를 기획한 공안검사 출신의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기용이 대표적이다. 김 전 실장은 통합진보당 해산, 법원 견제, 야권 인사 고소·고발, 세월호와 관련한 여론조작과 언론통제 등 다방면에 손을 뻗었다.

박 전 대통령이 개성공단 폐쇄를 강행하고 북한 체제붕괴론을 거론하면서 남북관계는 대결시대로 돌아갔다. 안보·경제 위기를 강조하면서 국민들을 겁주고 무조건적인 ‘총화 단결’을 강조한 것도 아버지 시대와 다르지 않다. “역사를 잘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이라며 밀어붙인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실상 아버지 명예회복을 위한 것이란 의심을 받았다.

정경유착도 되살렸다. 박 전 대통령이 2015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가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국민연금 등이 지원토록 했고, 그 대가로 삼성은 최씨와 미르재단·K스포츠재단 등에 430억원대 뇌물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9일 국회 탄핵안 통과 직후 더 민낯을 드러냈다. 3차례 대국민담화에서 검찰과 특검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검찰·특검의 대면조사 요구, 청와대 압수수색 등을 모두 거부했다.

직무정지 상태에서 예고 없이 기자간담회를 열어 무죄를 강변하고, 극우 성향의 ‘정규재 TV’ 인터뷰를 통해 강경보수층의 탄핵 반대 집회를 부추겼다. 살아남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범죄 피의자처럼 군 것이다. 하지만 헌재의 ‘파면 선고’에 이은 이날 법정구속으로 불명예 퇴장했다. 영광은 짧았고, 무능과 오욕은 역사에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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