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형 국립외교원장 신년 인터뷰 “각자도생하는 세계…한국, 전략적 모호성 벗고 선제적 외교를”

2020.01.02 21:44 입력 2020.01.02 22:10 수정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이 2일 서울 서초동 국립외교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새해 문재인 정부 외교정책 방향과 지난 1일 북한의 노동당 중앙위원회 5차 전원회의 결과 등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이 2일 서울 서초동 국립외교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새해 문재인 정부 외교정책 방향과 지난 1일 북한의 노동당 중앙위원회 5차 전원회의 결과 등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남한 언급 안 한 북 전원회의
정부 역할 촉구로 해석 가능
정권의 이익보다 미래 위해
비아냥 각오 ‘평화’ 추구해야

문재인 정부 집권 4년차인 2020년, 한반도 정세는 안갯속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핵·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재개와 새로운 전략무기 도발을 시사했다. 미국과는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일본과는 강제징용과 수출규제 문제를 놓고 대립이 빚어지고 있다.

김준형 국립외교원장(57)은 2일 서울 서초동 국립외교원에서 진행된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새해 한국 외교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정권의 이익보다는 국익과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면, 미련한 것처럼 보여도 평화라는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8월부터 국립외교원장을 맡은 김 원장은 30여년 국제정치학을 연구한 학자 입장에서 때로 과감하고 솔직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북·미 비핵화 협상의 돌파구로 “북·미 모두 조금씩 더 내놓는 ‘플러스알파’ 합의”를 제안했다. 미·중 패권경쟁 격화 속에 “한국이 전략적 모호성을 벗어나 선제적인 외교원칙을 제시해야 한다”고도 했다. 청와대가 외교·안보 정책 전반을 주도하는 경향을 두고는 “세계적 추세이지만 청와대 뒤에 모든 부서가 숨어 있거나 수행만 하는 형태는 좋지 않다”며 ‘권한 위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문재인 정부 전반기 외교·안보 정책을 평가하고 후반기 방향을 제시한다면.

“지난 3년간을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프로세스 측면에서 표현해보면, 2017년은 전쟁 직전까지 갔고(X표), 2018년은 180도 반전됐고(○표), 2019년은 기로에 섰다(△표). 2020년 역시 현실적으로는 삼각표가 될 가능성이 여전히 많다. 이 정부는 한반도 평화에 모든 것을 올인했는데, 그러다 보니 외교 다변화 등 다른 역량 발휘가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 문제는 한국 외교 도약의 걸림돌이다. 세계는 각자도생으로 가고 있다. 모든 국가가 동시에 어려움을 겪으면 외교의 국내 정치화가 심각해진다. 재무장, 군사강국화, 민족주의 발호가 세계적 현상이고, 미·중·일·러도 권력 강화를 위해 외부의 적을 부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권 이익보다는 국익이나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면, 미련한 것처럼 보여도 평화라는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자존심 없는 정부, 북한에 꼼짝 못하는 정부라는 비아냥을 듣더라도 미래를 생각하면 평화를 선택해야 한다.”

- 2020년에도 미·중 패권경쟁 지속으로 세계적 불확실성이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수십년, 길게는 50년간 미·중 대결 구조가 계속될 것이다. 미·중이 무역전쟁, 중거리핵전력조약(INF) 문제, 남중국해, 통화 등 각 분야에서 끊임없이 서로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주변국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동북아 지역, 한반도에서 미·중의 선이 확실히 갈리게 될 것이다. ‘하드 워’는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편들기를 강요하는 형태가 지속될 것이다.”

- 편 가르기 구도가 됐을 때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선택 구도로 가지 않도록 다양한 정지작업을 해야 한다고 본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갈등의 교훈을 보자. 배치 직전까지 ‘NCND’(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음)로 일관했다. 일종의 전략적 모호성인데, 앞으로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선제적인 외교원칙을 제시해야 한다. 자유무역이나 항행의 자유권 지지, 동북아 비핵지대 구상 등에 따라 비슷한 상황에 처한 국가들과 연대하는 게 최선이다. 한·미동맹이나 한·중 경제협력이라는 기본구조는 건드리지 않더라도, 다자적 접근법으로 외교를 다변화해야 한다. 신남방정책, 신북방정책을 기안했던 이유다.”

북·미 판 깨진 건 아니지만
‘북은 못 깬다’ 오판은 위험
25년간 비핵화 옵션 소진
북에 확신 줘야 협상 임할 것
미국이 뭔가 내놔야 할 시점

- 전원회의를 통해 공개된 북한의 ‘새로운 길’을 어떻게 평가하나.

“북한이 어마어마하게 고민을 한 것 같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당이나 인민들을 향해 보고하거나 발표하는 지시사항이라기보다, 온 나라가 통째로 의지를 다지는 정치적 동원의 형태를 띠었다. 내용적으로는 총체적 난국이라는 인식을 보여줬는데 원인은 적대세력 미국 때문이고, 자력갱생으로 견디겠다고 했다. 크리스마스 도발이나 말폭탄이 없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다행스럽지만,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반대되는 기조가 상당히 실려 있다. 전체 협상판이 깨진 건 아니지만 북한이 깨지 못할 거라고 오판하는 건 위험하다.”

- 모라토리엄 파기나 전략무기 도발 등 한반도 긴장이 커질 것이란 우려도 있다.

“시간이 많지 않다. 북한은 지난 25년간의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대부분의 옵션을 다 소진했다. 딱 하나 새로운 점은 그동안 차관보급에서 이뤄진 논의가 최고 정상 차원으로 격상됐다는 점이다. 그런데 하노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도박이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북한이 확실히 깨달았다. 북한으로서는 2018년의 트럼프와 하노이의 트럼프 사이에서 고민이 굉장히 깊어졌다. (비핵화를) 하고 싶고 또 할 마음이 있더라도, 트럼프 재선 여부를 의식할 것이다. 미국으로부터 확실한 보증이나 시그널이 오지 않으면 (협상에) 나오기 어렵다. 도발 수위를 계속 높이면서, 최악의 경우 ICBM 발사도 할 수 있다.”

- 시간이 없다고 했는데, 비핵화 협상 전망은.

“두고두고 아쉬운 게 하노이다. 북·미가 서로 요구조건을 들이밀고 서로 주고받다가 깨졌으면 괜찮은데, 출발선에서 깨져버렸다. 영변의 가치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미국이 일단 영변을 받아놓고 그다음을 요구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지난 3년간 가시적인 비핵화 성과가 없다는 게 아쉽다. 북·미 모두 조금씩 더 내놓는 ‘플러스알파’ 합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북한은 영변에 더해 핵물질 생산을 중단·동결하고, 미국은 제재 완화에 더해 북한이 말하는 체제 보장과 관련된 구체적인 신뢰조치를 내놓는 게 알파딜이다. 결국 서로 만나야 하는데 북한은 내놨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던져줄 시점이다.”

- 북한이 원하는 제재 완화 요구에 미국이 응답할까.

“70년간의 불신 문제가 다시 드러났다. 국제정치에서는 안보 딜레마라고도 하는데, 강대국과 약소국의 처지가 다르다. 강대국은 딜이 실패해도 죽지 않지만, 약소국은 죽는다. 북한은 리비아에서 그걸 봤다.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중국과 러시아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재 완화 결의안을 제출했는데, 미국이 다른 때처럼 일언지하에 거절하거나 망신을 주지는 않았다. 다만 중·러까지 참여하는 다자적 접근 방식으로 북핵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에는 반대한다. 북·미 또는 남·북·미가 핵 문제를 해결한 다음 최종 승인 단계에서 6자가 참여하는 게 바람직하다. ‘선 양자, 후 다자’ 구도다.”

- 전원회의 결정서에 남북관계가 언급되지 않았다.

“그간 우리 노력을 생각해보면 사실 섭섭하다. 그런데 북한 입장에서 보면 9·19 평양 정상회담에서 영변을 내놓은 것이나 지난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에서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재개를 언급한 것은 전적으로 남한의 능력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보기에는 우리가 미국을 설득하지 못했고, 신뢰가 깨진 것이다. 오지랖 넓은 중재자가 되지 말고 당사자가 되라고도 했다. 어떻게 보면 한국 역할을 촉구하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 정부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다들 ‘플랜 B’가 있는데 우리는 없는 것 같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더 이상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않겠다거나 전략적 인내로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또한 북한이 전략 도발로 간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가. 미국과 공조해 북한을 설득하는 게 가장 좋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2017년 때처럼 북·미 사이에 끼어 있을 것인지 아니면 나름대로 역할을 해서 플레이어로 갈지 준비해야 한다.”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
미 내부도 ‘트럼프 억지’ 우려
요구사항 더 상세히 공개해
‘지렛대’ 활용하는 것도 필요

- 한·미동맹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전략은.

“국익보다 동맹이 앞설 수 없다고 늘 말해왔다. 동맹은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동맹 70년의 관성이나 남북관계 어려움으로 인해 동맹 자체가 신화화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실제 지금 동맹이 흔들리는 건 미국발 특히 트럼프발이고, 미국 내부에서도 걱정한다. 이 점이 오히려 찬스다. 지금 협상팀이 잘하고 있지만, 대미 레버리지 차원에서 미국의 요구사항을 국민들에게 더 알리고 공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 제임스 드하트 미국 협상대표가 50억달러를 요구한 적이 없다고 했다. 사실은 48억9000만달러를 요구했다. 말장난이다. 드하트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려도 되지 않을까.”

- 한·일 갈등이 대화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수출규제 조치나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양국의 간극이 크다.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유예’ 카드를 들고나온 것은 일본 태도 변화 여부에 따라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한·일관계도 일본이 변할 것처럼 하면서도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으면 어쩌냐는 딜레마가 있다. 어쨌든 일본이 수출규제를 풀어야 GSOMIA를 연장할 수 있고, 강제징용은 다른 트랙에서 논의하자는 입장은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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