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회의서도 ‘현안’ 언급 안해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또 침묵했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 검찰 수사 외압 논란으로 정국이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지만 국정 최고책임자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다. 박 대통령이 ‘사과’ 한마디를 아끼다 불길을 키우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지난달 30일 수석비서관회의 이후 22일 만에 직접 주재한 회의였다. 전날 국회 국정감사에서 윤석열 여주지청장이 국정원 수사를 두고 폭탄 발언을 해 어떤 식으로든 입장을 밝힐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박 대통령은 그러나 입을 닫았다. 모두발언, 비공개회의에서도 정국 현안은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대신 “정부와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은 기업이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라며 딴 얘기를 했다. “정치권이 경제활성화를 위해 법과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민생을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고도 했다. 정치권이 정쟁에만 매몰돼 있다고 간접 비판한 것이다.
국정원 사건이 확대일로로 치닫는 데 대한 박 대통령 책임론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간 사과 내지 유감 표명으로 논란을 털어낼 기회가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6월24일 민주당 김한길 대표의 공개 서한, 9월16일 국회 3자회담 등이 대표적이다. 그때마다 “대선 때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 선거에 활용한 적도 없다”고 일축했다. 박 대통령은 3자회담 때 거듭되는 문제 제기에 “그렇다면 제가 댓글 때문에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것인가”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고 김 대표가 이날 KBS 1TV에서 뒷얘기를 소개했다.
앞서 민주당은 새 정부 출범 직후 국정원 사건이 불거졌을 때 박근혜 정부 책임을 묻지 않았다. 여당이 “대선 불복이냐”고 공격할 때도 ‘대선 불복은 아니다’라고 명확히 선을 그어왔다. 대신 국정 책임자로서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에 대한 사과, 국정원 개혁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무관함만 거듭 강조해왔다.
오히려 국정원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등 정치의 한복판에 들어와 정국을 소용돌이로 몰아넣는데도 어떤 통제도 하지 않았다. 여당에서 채동욱 검찰총장 재임 시 국정원 댓글 수사를 비난하며 ‘검찰총장 찍어내기’를 현실화했지만 모르는 체했다. 국가기관의 비정상적 행위를 정상화하기보다 검찰 등 권력기관을 더 움켜쥐려는 모습으로만 비쳤다. ‘국정원 대선개입과 무관하다’는 박 대통령의 진짜 속뜻을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져버렸다.
그사이 국정원 댓글 사건은 댓글뿐 아니라 트위터 대선개입, 군 사이버사령부의 댓글 작업 등 국가기관의 조직적 대선개입 사건으로 확대됐다.
국정원 사건이 더 이상 이명박 정부 일로 국한되는 게 아니라 박 대통령이 직접 결단해야 한다는 여론 압박도 커지고 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아야 할 상황에 처하면서 정부 출범 8개월 만에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는 말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