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미아’ 1년, 바닥 떠돈 최영필

2011.11.08 21:28

프로야구 3년 규정 묶여 멕시코·일본 등 전전

프로야구의 11월은 자유계약선수(FA)의 계절이다. 수많은 A급 선수가 FA 자격을 얻어 이적을 노린다. 하지만 FA가 모든 이에게 꿈을 실현시켜 주지는 않는다. FA는 때로 쇠사슬이 되어 선수를 옭죈다.

최영필(37)은 FA다. 자유를 얻었지만 오히려 어떤 팀에도 갈 수 없는 족쇄가 됐다. 2010시즌을 마치고 FA를 선언했지만 원 소속구단 한화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보상선수 규정’에 묶여 사실상 그 어떤 팀에서도 뛸 수 없다. 최영필을 영입하는 팀은 FA 직전연도 연봉의 300%와 보호선수 18명을 제외한 1명을 보상선수로 한화에 내줘야 한다. 최영필은 지난 1년 동안 세상의 온갖 ‘바닥 야구’를 겪으며 기다렸지만 프로야구 규약은 ‘3년’을 족쇄로 채웠다. FA 선언 뒤 3년이 지나야 ‘보상선수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프로야구 한화에서 뛰었던 최영필은 1년을 해외리그에서 떠돌았지만 여전히 FA 보상규정에 묶여 있다. 최영필이 한화 시절 공을 던지는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프로야구 한화에서 뛰었던 최영필은 1년을 해외리그에서 떠돌았지만 여전히 FA 보상규정에 묶여 있다. 최영필이 한화 시절 공을 던지는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1년은 길었다. 지난 시즌 FA 시장에서 버림받은 뒤 최영필은 곧장 미국으로 날아갔다. 트리플A 테스트를 받았지만 그들이 원했던 구속이 나오지 않았다. 미국의 에이전트는 최영필에게 멕시칸리그를 소개시켜 줬다. 멕시코 칸쿤의 티그레스라는 팀이었다. 티그레스에는 한화와 넥센에서 뛰었던 더그 클락이 뛰고 있었다.

최영필은 그곳에서 연습경기 3경기를 뛰었다. 3이닝, 4이닝, 4이닝을 던졌고 3실점하는 동안 삼진 9개를 잡았다.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티그레스 구단은 시속 90마일(약 145㎞)을 요구했다. 최영필의 최고구속은 88마일(142㎞)에 그쳤다. 최영필은 “한국에서 겨우내 영하 10도에서 피칭을 해야 했다. 기를 썼지만 2마일이 모자랐다”고 했다.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일본 프로야구를 노크했다. 김경태가 뛰었던 시코쿠-큐스 아일랜드 리그의 가가와 올리브 가이너즈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테스트는 합격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조건이 발목을 잡았다. 취업비자가 나오는 데 한 달 이상이 걸렸다. 마음이 급했다. 최영필은 “말이 통하지 않는 가운데 숙식도 혼자서 해결해야 했다. 무엇보다 경기에 빨리 나가고 싶었다. 취업비자가 걸림돌이 됐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택한 곳이 일본 독립리그 팀 중 한국 선수가 많이 뛰고 있는 서울 해치스였다. SK와 한화를 거친 양승학 등이 뛰는 팀이었다. 최영필은 선수 겸 코치로 뛰었다. 어린 선수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팀에서는 마무리 역할을 맡았다. 선발로 딱 한 차례 등판해 0-1 완투패를 기록했다. 서울 해치스는 선수들의 숙식을 해결해 주는 대신 급여가 없다. 최영필은 “그래도 여기서는 야구를 할 수 있었다. 선수들과 함께 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고 했다.

시즌을 마친 뒤 최영필은 국내로 돌아왔다. 여전히 규약도, 상황도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 소속구단인 한화에 보상규정을 포기해 줄 수 없는지 문의했지만 “다른 팀의 상황도 있고, 규약에도 나와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들어주기 어렵다”는 답만 들었다.

그렇다고 공을 놓을 수는 없었다. 최영필은 성균관대와 아들 종현군(중3)이 뛰는 공주중을 오가며 몸을 만들고 있다. 최영필은 “성균관대에서 몸을 만들고 있을 때 김성근 전 SK 감독님을 뵈었다. 기분 좋으라고 하신 말이겠지만 ‘아직 3년은 거뜬하겠는데’라고 해 주셨다”고 했다. 최영필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고 덧붙였다.

최영필은 멕시칸리그를 거쳐 일본 독립리그 서울 해치스에서 마무리 투수로 뛰었다. | 서울 해치스 제공

최영필은 멕시칸리그를 거쳐 일본 독립리그 서울 해치스에서 마무리 투수로 뛰었다. | 서울 해치스 제공

야구를 포기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최영필은 “아직 내 공은 나쁘지 않다. 어디 아픈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145㎞ 이상 던질 수 있다. 이 공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두 번째 이유는 아들이다. 종현군은 남보다 늦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최영필은 “야구를 시키고 싶지 않았다.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는 걸 내가 더 잘 안다”고 했다. 하지만 아들에게 아버지는 아직 훌륭한 투수였다. 최영필의 전성기는 2005년 준플레이오프 MVP를 땄을 때다. 최영필은 “그때 처음으로 아들에게 야구선수 아버지였던 것 같다”고 했다.

오른손 투수 종현군은 내년이면 제물포고에 진학한다. 3년이 지나면 프로야구 드래프트에 나설 수 있다. 한 야구 관계자는 “늦게 시작한 것치고 꽤 잘 던진다”는 평가를 했다. 최영필은 “아직 야구를 할 수 있다. 4년만 더 뛸 수 있다면 프로야구 최초로 ‘부자’가 선수로 함께 뛰는 일이 실현된다”고 했다. 아버지의 꿈이다.

하지만 여전히 꿈은 ‘규약’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멈춰 있다. FA제도에서 ‘3년간 보상 유지’ 규정은 A급 선수의 ‘고의 계약 거부’를 막기 위한 장치다. 그러나 이는 더 많은 B급 이하 선수들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막는 걸림돌이기도 하다. 프로야구 선수협회 관계자는 “헌법소원을 비롯한 법적 대응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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