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영과 1000명에 육박하는 출마자들

2020.03.02 20:51 입력 2020.04.29 13:32 수정

온갖 기행으로 유명한 허경영씨는 매주 토요일 대중강연을 연다. 위치는 서울 종로3가, 서울지하철 1·3·5호선이 교차하는 주요 환승역이자 노인들의 모임터로 알려진 탑골공원이 있는 곳이다. 허씨는 2009년 7월 이후 지금까지 줄곧 이 강연회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직설]허경영과 1000명에 육박하는 출마자들

그가 이번 제21대 총선을 앞두고 정당을 하나 만들었다. 이름은 국가혁명배당금당. 그가 만든 당답게 주요 공약들이 허무맹랑하다. 온갖 명목의 현금 지급 공약과 유엔본부를 판문점으로 이전하자는 공약, ‘내수경제를 위축시키는’ 김영란법을 폐지하자는 공약 등이 있다.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하는데 ‘복지국가’도 건설하겠다는 해괴한 지향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다수의 공약들이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분류된 수혜대상과 수혜조건을 강조하고 있어 현혹되기 좋다는 점은 언급해둘 만하다.

이 당은 제21대 총선 예비후보 등록 기간 동안 제법 화제가 됐다. 우선 출마자 수. 3월1일 기준으로 무려 977명이 예비후보자로 등록했다. 전체 출마자의 약 40% 정도다. 그리고 전과 전력. 출마자의 30% 이상이 전과가 있다. 음주운전과 성범죄, 심지어는 살인 전과자까지 있을 정도다. 그런데 좀 더 찬찬히 뜯어보면 나이, 학력, 직업도 보인다. 그들 대부분이 50대 이상의 중장년이며 더러 80대 출마자도 있다. 언론 취재에 따르면 출마자 중 절반이 학력 칸을 비워뒀거나 중졸 이하라고 한다. 이들의 직업은 정말로 현실적이다. 요양보호사, 용달화물 운전자, 미화원, 건설노무자, 마트 캐셔, 백화점 아르바이트, 기계청소부, 택배기사, 페인트공이 대거 예비후보자로 나섰다.

나이나 학력, 직업만으로 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되지만, 다소의 위험성을 감수하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짐작해보자. 허경영씨의 강연이 열리는 장소와 국가혁명배당금당의 선심성 공약들이 어필하는 사회적 계층, 예비후보들의 나이와 학력, 직업을 통틀어 보았을 때 이들의 사회적 지위가 부자와 빈자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울 것 같은가? 청년 당사자 정치가 유효하다면 이들의 장년 당사자 정치도 유효할 것이며, 노동자 당사자 정치가 유효하다면 이들이야말로 바로 그 노동자 당사자들이다. 이들의 출마는 간단히 농담거리로 삼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국가혁명배당금당은 정상적인 정당이라기엔 문제가 많은 ‘사이비 정당’이다. 공약들은 실현 가능성을 찾기 어려우며 정치적 책임성도 찾아보기 어렵다. 1인의 사당이라는 느낌을 도무지 지울 수가 없다. 당 로고부터가 허경영씨를 형상화한 모양일 정도다. 한편으론 ‘사이비 종교’스러운 면모들도 보인다. 허경영씨는 강연에서 스스로를 ‘신인(神人)’이라 자칭하고, 지지자들에게 선거에 출마하면 ‘백궁’이라는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독려하는 식이다.

그래서 국가혁명배당금당의 ‘당사자 천 명의 예비후보 출마’라는 성과를 아프게 주목한다. 이 ‘사이비 정당’이 종로3가에서 10여년간 꾸준히 사람들을 모아오는 동안 ‘진짜 정당’들은 어디서 누구를 모아내고 있었던가. 이 ‘사이비 정당’이 요양보호사, 미화원, 백화점 아르바이트, 페인트공들과 만나길 주저하지 않는 동안 ‘진짜 정당’들은 어디서 누구와 만나고 있었던가. 이 ‘사이비 정당’이 비록 현실성은 떨어지지만 듣기에 구체적인 정책을 피부에 와닿게 제시하는 동안 ‘진짜 정당’들은 어떤 정책을 개발하고 또 알리고 있었던가. 왜 ‘진짜 정당’이 있어야 할 곳에 ‘사이비 정당’만이 있었는가.

정치학에는 ‘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정치한다는 정당들은 늘 이 사실에 당황하며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정작 가난한 사람들의 삶터에서 그들과 꾸준히 만나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물어본 정치인과 정당은 얼마나 있었을까. 허경영과 천 명의 출마자들을 마주하여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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