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제조업까지 칼바람… 사측 손 들어준 법원·정부는 ‘뒷짐’

2015.03.25 22:02 입력 2015.03.25 22:50 수정
강진구 기자

1 빗장 풀린 정리해고

▲ 기술료 연 1000억 하이디스
인건비 200억에 불과한데도
“공장문 닫겠다” 최후통첩

▲ 사측 ‘긴박한 경영 위기’ 남용
맨 먼저 정리해고 카드 꺼내
고용 생태계 급격히 무너져

‘해고 절벽’ 앞에 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후 비정규직을 보호막 삼아 버텨오던 정규직의 고용 생태계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통신사·건설사·금융권에서 시작된 구조조정 바람은 강성노조가 버텨온 제조업까지 번졌다. 지난 1월 중순부터 과장급 이상 사무직 노동자 1500여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은 현대중공업이 대표적이다. 희망퇴직이란 꼬리표가 붙었지만,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나 다름없다”고 말하고 있다. 정규직도 예외 없는 해고의 칼바람은 외환위기 후 정리해고 요건을 사용자에게 유리하게 판례를 변경해온 사법부, 외자 유치를 이유로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대응입법을 도외시한 정치권과 정부가 함께 쌓아온 ‘업보’이다.

연간 1000억원이 넘는 특허권 수입을 챙기면서도 오는 31일자로 공장 폐쇄를 결정해 377명의 노동자가 졸지에 길거리로 내몰릴 위기에 처한 대만계 ‘먹튀자본’ 하이디스 사례는 정규직의 고용 불안정이 어느 정도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는 31일자로 공장 폐쇄를 통보받은 하이디스 노동자들이 25일 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대주주의 모기업 영풍그룹 본사 앞에서 삭발식을 하고 있다. | 금속노조 하이디스지회 제공

오는 31일자로 공장 폐쇄를 통보받은 하이디스 노동자들이 25일 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대주주의 모기업 영풍그룹 본사 앞에서 삭발식을 하고 있다. | 금속노조 하이디스지회 제공

하이디스는 핵심 기술을 경쟁업체에 팔아 2028년까지 매년 기술료로만 1000억원대의 수입이 예정돼 있다. 인건비는 고작 200억원에 불과한데도 회사는 투자를 통해 생산라인 경쟁력을 높이지 않고 지난 1월 공장문을 닫겠다고 노동자들에게 최후통첩했다. 하지만 정부는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다.

고우정 하이디스 사무직노조위원장은 “노동청에서는 ‘부당해고 구제신청 제기 외에 다른 방법이 없고 그나마 경영상 해고가 무효로 판단되는 경우는 드물다’는 얘기만 한다”며 “정리해고의 둑이 완전히 무너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실제 대법원은 2002년 판례 변경을 통해 근로기준법 24조의 정리해고 요건 중 ‘긴박한 경영상 위기’에 대해 도산을 회피하기 위한 경우에 한정하지 않고 장래에 올 수도 있는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경우로까지 확대했다. 인원 감축 규모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경영자 판단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2007년 안정적인 경영흑자를 기록한 콜텍악기가 대전공장을 폐쇄한 데 대해서도 대법원은 “전체 경영실적이 흑자를 기록해도 일부 사업부문이 경영악화를 겪고 있는 경우 정리해고를 할 수 있다”고 사용자 손을 들어줬다. 지난해에만 900억원이 넘는 당기순이익을 기록하고도 제조부문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리해고를 단행한 하이디스가 ‘법으로 가도 불리할 게 없다’며 자신감을 갖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꾸로 가는 노동 개혁]정규직·제조업까지 칼바람… 사측 손 들어준 법원·정부는 ‘뒷짐’

정리해고를 막는 빗장이 하나둘씩 풀리면서 경기가 조금만 나빠져도 정리해고를 통보하고 노동자들은 위로금이라도 받기 위해 희망퇴직을 신청하는 사례가 넘쳐나고 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의 분석 결과 2013~2014년 사이 구조조정으로 정리된 인원은 통신업에서 8820명, 제조업 3677명, 제2금융권 1만7426명, 은행권에서 1355명 등 총 3만1278명에 달한다.

부산에서 선박수리업을 하는 롤스로이스 마린코리아는 2009년 43억원이던 영업이익이 2013년 20억원으로 줄어들자 경영상 위기를 주장하며 외주화를 결정하고 지난해 9월 희망퇴직을 거부한 노동자 12명을 정리해고했다.

재계 순위 50위인 일진그룹 주력 계열사 일진전기도 중국에서 생산되는 광케이블과 비교해 가격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순이익을 기록하고 있는 와중에 지난해 10월 정리해고 방침을 밝혔다. 노조는 ‘주야 3교대로 전환할 경우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했지만 사측은 30명을 희망퇴직으로 내보내고 올 1월 6명을 정리해고했다. 정리해고가 경영위기 극복을 위한 최후수단이 아니라 가장 먼저 손쉽게 꺼내드는 수단이 된 셈이다. 특히 회계조작 의혹이 있는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에 대해 지난해 11월 대법원이 2심 판결을 뒤집고 긴박한 경영상 위기를 인정한 이후부터 정리해고 광풍은 더욱 거세지는 분위기다.

금속노련 정태교 조직차장은 “지난해 말부터 단위노조에서 한 사업부문이라도 중국과의 경쟁에서 떨어진다고 판단되면 외주화와 함께 정리해고를 밀어붙이는 사업장이 부쩍 증가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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