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미투’운동이다

2018.02.25 21:16 입력 2018.02.25 21:21 수정

성교육을 진행한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성폭력이 발생했단 소식을 들을 때가 있다. 때론 “왜 성교육을 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죠?” “성교육 시간에 감지된 (문제적) 특성이 있었나요”란 질문을 받는다. 교육에서 내가 무엇을 놓쳤을까 자책하며 참여자의 특성을 복기하다 고개를 가로젓는다. 거주시설 장애인 성폭력은 구조적 특성과 일상의 문화가 변하지 않는 한 막을 수 없다. 오랜 세월 함께 생활하는 공간에서 관리와 안전을 이유로 묵인되었던 차별과 폭력들. 사생활의 권리는 없지만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예절은 지켜야 한다. 자연스럽게 감정 표현보다 감정 숨기기를 더 권장하는 곳에서 거절의 단호함은 나오기 어렵다. 거절을 표현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 그것이 차별이다. 가해·피해의 다양한 원인과 과정이 숙고되기도 어려우니 사건 해결과 후속조치도 투명치 못하다. 피해를 이야기하고 그것이 드러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만, 사건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는 일상과 현실, 공간이 분리되지 않아도 갈 곳이 없어 보복의 두려움을 참아야 한다. 달라지지 않을 거란 체화된 경험은 체념을 낳는다. 성폭력이 발생하면 많은 경우 탓할 명분과 근거를 찾는데, 그 탓은 대부분 장애특성으로 돌려진다.

[NGO 발언대]그러니까 ‘미투’운동이다

미투(#MeToo)운동이 법조계, 문화계, 연극계, 종교계 등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사건은 대부분 수년 전부터 반복적으로 발생해 왔다. 선배, 선생, 상사, 감독 등의 사회적 지위와 불평등한 성별 간 권력관계는 쉽게 폭력으로 연결된다. 내부 성폭력 사건의 폭로는 피해자에게 생계, 경력, 활동, 사회적 관계 등의 위협과 불이익, 비난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긴 시간 피해 경험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배경들이며 피해자 지원체계가 내부자 지원, 노동권, 주거권 등 다각도로 필요한 이유다. 보호를 명분으로 관리하는 질서가 장애인의 성적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성폭력에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했다. 장애인에게 보호를 강요하는 것처럼, 수많은 미투를 외치는 피해자들에겐 예술, 권위, 질서, 조직, 성장 등의 명분을 강요한다. 미투운동은 한국 사회 혐오와 차별의 구조를 반대하는 연대를 향해 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니까 #MeToo 운동이다.

오랫동안 장애인 성폭력은 그 취약성과 특수성을 강조해야 사회가 주목해 왔다. 그러나 폭력의 유형과 피해자별 특수성을 강조할 때 역설적으로 개인의 피해 경험을 온전히 말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아동청소년, 이주인,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성폭력의 특수성은 집단의 특수한 성격 찾기를 사회가 이들을 대하는 특정한 혐오와 차별적 구조의 보편성 찾기로 전환해야 한다. 어떤 집단의 특수한 사회적 위치가 혐오와 차별을 만날 때 피해가 심해지는 것인데, 특수성을 원인과 결과로 보면 그 집단은 비정상화될 수밖에 없다. ‘검사마저도?’ ‘○○계는 그럴 줄 알았어’라는 인식을 경계해야 이유다. 개인이나 집단의 특수성 만들기를 작동시키는 정상 규범이 또 다른 차별을 불러올 수 있다. 소수자의 미투를 집단의 정체성으로 특수화시키지 않으면서 성폭력을 작동시키는 구조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 열악하고 특수한 위치로 피해자를 이해하는 방식은 피해자를 나와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기 어렵게 하고, 나 또한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성찰을 가로막는다. 그러니까 #MeToo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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