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분배

2019.01.02 20:59 입력 2019.01.03 14:49 수정

산업혁명기 유럽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은 30세 전후였다고 한다. 반대로 새롭게 세상의 주인이 된 자본가, 즉 부르주아들은 결혼에 앞서 양가의 가계도를 펼쳐놓고 장애인이나 병자가 없는지를 꼼꼼히 따져가며 자신들의 ‘선천적’ 우월성을 증명해줄 계급의 육체와 건강을 만드느라 애썼다. 죽음 앞의 평등이라는 이야기가 무색해지는 것은, 그것에 이르는 과정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직설]죽음의 분배

생각해보면 모든 인간이 평등한 시간이란 심장이 멎는 찰나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마저도 못 견디는 부자와 권력자들은 안간힘을 쓰며 그것에 맞서려고 노력한다. 기약 없는 미래에 기대어 자신의 시신을 냉동보관하겠다며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는 해프닝이 일어나고, 어느 굴지의 대기업 회장은 의식 없이 의료기기들에 의존해 ‘안정적으로 생존’해 있는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차명계좌와 탈세 혐의가 발견되고 있다. 이들도 모두 결국에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을 24세 하청 노동자가 맞이한 죽음이나, 안전설비 없는 낡은 건물에서 일어난 화재, 또는 환불을 해주지 않고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남성에게 살해당한 성매매 여성의 죽음 같은 것과 비교해 평등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위험과 죽음의 분배는 돈과 권력이 그렇듯 불평등하다. 어떤 이들은 부자들이 위험을 감수했기에 부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디에 투자를 할지 고르는 위험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작업환경이 주는 위험 사이에는 엄청난 사회적 거리가 놓여 있다. 그 어떤 호전적인 투자자도 자신의 최후를 발전소의 하청노동자로서 랜턴도 없이 위험천만한 안전점검 업무를 하다가 맞이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그는 주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며 기업의 비용절감과 더 많은 배당에 기꺼이 한 표를 던졌을 것이다. 더 많은 구조조정과 아웃소싱이 일어나지 않았음에 불만에 차 투덜거리면서 말이다.

물론 위험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을 완전히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의 운명론적인 성격을 이야기하기에는 그야말로 불 보듯 뻔한 것들이 여전히 많다. 이것은 단순히 안전규정과 장비의 유무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위험이다. 그곳에서 위험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과 비용보다, ‘위험수당’을 얹어주고, 만에 하나 사고가 발생해 누군가 다치고 죽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비용이 더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한국의 경우처럼 가장 위험한 업무도 가장 적은 권한만을 갖고 있는 불안정한 하청노동자에게 떠맡기는 것이 가능하다면, 누구보다도 ‘경제적’이고자 하는 자본들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단지 산업재해 문제만이 아니다. 고급 거주구역에 설치된 방범시설과 CCTV는 범죄를 낙후된 지역으로 밀어낸다. 대도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전기를 위한 설비들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지어져 그곳 주민들의 건강을 위협한다. 위험과 죽음은 결국 가장 힘없는 이들에게로 향한다. 김낙년 교수의 <한국의 학력별 사망률 격차, 1985~2015>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사망률이 낮아지는 가운데 그 효과는 학력에 따라 차등화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특히 60세 이상에서 격차가 크게 벌어졌는데, 준비할 겨를도 없이 세월을 맞은 이들에게로 죽음이 몰려간 탓이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사람의 가격’은 돈으로도, 사회적 가치로서도 너무 저렴하다. 만약 안전사고가 났을 때 기업에 철저한 징벌이 내려졌다면, 자본가들은 안정규칙을 귀찮아하는 노동자들을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말리고, 수많은 연구자금을 안전을 위한 대책마련에 쏟아부었을 터다. 그러나 현실은 누더기로 통과된 산안법에 대해 기업의 부담을 준다며 발악하는 보수언론과 재계의 목소리다.

위험과 죽음을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에 대비하고, 책임을 분담함으로써 그것에 맞설 수는 있다. 그러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을 우리는 ‘사회’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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