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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냉면광시대

2016.06.16 20:59 입력 2016.06.16 21:03 수정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스마트 냉면광시대

마치 빗장이나 봉인이 풀린 느낌이다. 냉면집에 대한 이야기다. 오랫동안 냉면집은 이른바 전통의 명가들이 대세였다. 새로운 냉면집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물론 평양식이라고 하는 물냉면을 말한다. 양념을 얹어 먹는 함흥냉면은 흔하게 생겨나고, 막국수집도 새로 많이 문을 여는데 유독 평양식 냉면은 시장 진입이 어려웠다. 시중에 이름을 얻은 냉면집은 백년을 바라보는 우래옥은 물론이고, 적어도 1970~1980년대에 대개 문을 열었다.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스마트 냉면광시대

물냉면은 단순해서 어렵다고들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잘 안 먹힌다는 뜻이다. 보수적이다. 늘 먹던 냉면이 사반세기 동안 돌고 돌았다. 원래 갈비를 전문으로 하던 벽제갈비에서 우래옥 출신의 주방장을 새로 들여 내놓은 냉면은 그런 점에서 상당히 파격이었다. 맛이 달라졌다기보다 이른바 냉면에도 신흥 명문이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던 것이다. 그 브랜드가 바로 봉피양이다.

원래 냉면은 전문집뿐 아니라 여름이 되면 많은 시중 식당의 임시 메뉴였다. 옛날처럼 종이술을 내걸지는 않았지만, 빨간 천에 흰 글씨로 ‘냉면 개시’라고 펄럭이는 깃발을 달아 광고했다. 건조한 면을 삶고 그럭저럭 육수 비슷한 것을 내어 여름에 흔한 토마토와 오이를 얹어서 냈다. 날씨가 선선해지면 없어지는 메뉴였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냉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냉면은 냉면집에서. 어떤 불문율 같은 게 생겼던 것일까. 그렇게 냉면집은 날씨가 더워지면 줄을 서야 먹을 수 있는 집이 됐다.

그러던 냉면업계에 다른 바람이 솔솔 불었다. 오류동 평양냉면집 혈족이 광명시에 작은 냉면집을 열었다가 여의도에 크게 판을 벌였다. 원래 오류동 냉면이 품질이 좋았던지라, 좋은 맛을 내고 금세 소문이 났다. 정인면옥이다. 가족 경영이 이 집 냉면 맛을 돋워주는 요체다. 사장은 주방에서 반죽하고 부인과 아들이 홀에 나와 일을 돕는다. 판교에서 독학하듯 냉면을 만들어낸 ‘의지의 냉면인’도 있다. 능라도의 김영철 사장이다. 개업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주요 평양냉면의 반열에 들었다는 말을 듣는다. 맑은 국물과 부드러운 면이 일품이다. 마포에서는 무삼면옥이라는 특이한 냉면집도 선전하고 있다. 요즘에는 논현동에도 인기를 끄는 집이 생겼다. 진미평양냉면이라는 곳이다. 나중에 생긴 냉면집들이 이렇게나 인기를 끈 것은 일찍이 드문 일이다. ‘냉부심’(대중적이지 않은 평양식 냉면을 좋아한다는 자부심)이라는 말이 생길 만큼 평양식 냉면은 그동안 소수 마니아들의 아지트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이런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새로운 냉면집에 대한 정보가 빠르게 유통되고, ‘순례자’들이 돈다. 감상평이 좋으면 금세 손님들이 몰려간다. 내용이 있으면 역사를 따지지 않는 ‘신냉면애호가’들이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냉면은 어른들의 음식이었고, 서울사람들 중에서 미식가랄까, 음식을 좀 안다고 하는 부류를 상징하는 요리였다. 오랜 소수 집단의 냉면광시대가 저물고 네트워크를 통해서 접근하는 대중들의 ‘스마트 냉면광시대’가 도래했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서울은 냉면의 새 경지를 열고 있는 중이다. 100여년 전에 평양냉면이 서울에서 판을 벌이기 시작했던 시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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