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486세대의 ‘고해성사’

2014.01.20 20:39
박민영 | 문화평론가

몇 년 전의 일이다. 한 지방에서 사회과학 동아리 대학생들이 강의를 요청해왔다. 놀랍고 반가웠다. 요즘 대학생들은 영어 공부하고 스펙 쌓느라 정신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도 사회과학 동아리들이 남아 있었다니!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많지 않은 인원이었다. 나도 대학 시절 서클에서 사회과학 공부를 열심히 했던 사람이다. 그런 까닭에 동질감을 느끼며 나의 대학 시절 이야기도 적잖이 했다. 서클에서 사회과학 공부했던 이야기며, 데모했던 이야기며….

[별별시선]어느 486세대의 ‘고해성사’

강의가 끝날 즈음 한 학생이 물었다. “선생님 얘기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선배들이 그렇게 열심히 싸웠는데, 사회가 왜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학생들에게 느꼈던 동료의식도 일순 사라졌다. 대학 시절 내가 4·19세대나, 5·18세대를 바라보던 눈빛으로 학생들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새삼 부끄러웠다. 나도 마흔이 넘었다. 기성세대에 편입된 사람으로서 청년들에게 좋은 사회를 물려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나는 머뭇거리다 이렇게 답했다. “당시에는 정치권력만 민주권력으로 바꿔놓으면 될 줄 알았습니다. 지금처럼 자본권력이 정치권력 위에 있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말도 다시 생각해보면,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권력이 정치권력보다 우위를 점해가는 과정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역시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486세대는 그러는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대학만 졸업하면 시민의 정치사회적 책무가 면제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486세대들은 민주화 이후,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했다. 그 결과,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사회구조가 형성되었다. 달리 말하면, 486세대가 신자유주의의 안착에 참여하고 기여했다는 말이다. 우리 세대가 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싸운 것은 맞다. 그러나 ‘이 정도면 나도 사회 민주화를 위해 할 만큼 했다’는 느낌 때문이었는지, 대부분의 486세대들은 대학 졸업 후 정치사회적 관심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시민적 안락에 빠져들었다.

486세대는 민주화의 세대이기도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을 받아들인 첫 세대이기도 했다. 냉전 체제가 소멸한 후, 세계는 신자유주의적 질서로 재편되었다. 사회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한다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을 내면화하는 것을 의미했다. 부당한 정치권력에 온몸을 던져 맞서던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신자유주의에는 별 문제의식을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은 경제활동 적응의 과정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대학에서 짱돌을 던지던 그들의 손에는 어느새 재테크서와 자기계발서가 들려 있었다.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확보한 486들은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그로 변신했다. 학생 운동권 특유의 열정은 ‘너 나이 때 나는 이렇게 무기력하지 않았다’며 후배들과 비정규직의 노동 열정을 다그치는 데 쓰였고, 사회과학 공부와 토론으로 단련된 사고 능력은 이익과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데 쓰였다. 학생 운동권 출신 중 재테크서나 자기계발서로 성공한 작가나, 그런 책을 기획 출판해 성공한 출판업자들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강남의 사교육 시장을 석권하며 학생들에게 무한경쟁의 논리를 전파한 것도 486이었다.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다. 사회에는 ‘모든 사회적 도태는 개인의 노력 부족’ 때문이라는 ‘기업가적 자아’를 내면화한 젊은이들, 그런 기업가의 시선으로 자신을 검열하고 남을 차별하고 냉소하는 젊은이들이 넘쳐난다. 주지하다시피 486세대는 ‘사회 조건’을 직시함으로써 저항의 에너지를 얻곤 했다. 그런 세대가 사회적 인식에 있어서 지적 불구의 괴물들이 양산되는 데 이바지한 것이다. 그 극단적인 형태가 바로 ‘일베’이다.

486세대에게는 ‘사회가 이만큼이라도 민주화된 것이 우리 때문’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그들은 <변호인> 같은 영화를 보며 추억하고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적은 우리 내부에 있다. 486들은 신자유주의에 적응하고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민주적 성과들을 스스로 허물었다. 20대들을 참혹한 경제적 노예로 만드는 데 일조한 것도 486이다. 20대에게 고해성사한다. ‘미안하다. 그대들을 괴물로 만든 것은 우리 486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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