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쏘다

황진이의 두 기생 ‘김영애 VS 김보연’

2006.11.23 09:41

[별을 쏘다]황진이의 두 기생 ‘김영애 VS 김보연’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은 여자들의 마음을 씁쓸하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그녀들의 독한 승부가 반갑다. 여느 사극처럼 남자의 마음을 얻기 위한 암투도 아니고, 완전한 선악구도도 아니다. 드라마 ‘황진이’에서 운명을 건 승부를 벌이고 있는 기녀들. 당대의 명기 황진이와 부용의 대결도 재밌지만, 그들을 길러낸 스승 기생 백무(사진 오른쪽)와 매향의 대결이 더 흥미롭다. 겉으로 보면 ‘여악행수(궁중연희를 담당하는 여악의 최고 권력을 가진 기녀)’가 되기 위한 자리싸움 같지만, 그들이 탐하는 것은 유한한 무엇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탱하게 만드는 자존심이다. 그것이 예술이든 권력이든 그들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기꺼이 몸을 던졌다.

◇재주에 죽고사는 예인(藝人), 백무(김영애)

송도교방의 행수 백무는 재주만을 탐한다. 기생에게 남자니 사랑이니 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너무 빨리 알았다. 쉽게 속을 드러내지도 않고 오직 고통을 벗삼아 예술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권세는 매향이 쥐고 있지만 재주만은 자신이 한 수 위라고 믿기에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어린 진이의 신명난 춤에서 끼를 알아보고 기녀가 되도록 끌어들인다.

백무 역을 연기하고 있는 김영애는 망설이는 진이에게 기녀의 삶이야말로 여자에겐 최고의 인생이라며 손을 내미는 장면을 ‘가장 백무다운 장면’으로 꼽았다. 선택하라고 하지만 실은 강요다. 그것도 목숨을 걸고 반대하는 눈 먼 진이의 어머니 앞에서. 김영애는 “백무는 (예술을 위해서라면) 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든 수단을 쓰는 여자”라고 말했다.

백무는 황진이가 자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숙적 매향과 손을 잡는 것도 받아들인다. 첫사랑을 잃고 5년여 동안 절대 춤을 추지 않았던 황진이가 어떤 이유로든 다시 춤을 추게 하기 위해서다. 김영애는 “무리한 연습으로 황진이가 발을 다칠 것을 염려해 매향을 찾아가 훼방을 놓는 척 조언하는 등 보통사람들보다 한 수 위의 인물”이라고 전했다. 김철규 PD는 “백무의 수가 너무 높아 어떻게 담아낼지 골치”라고 전했다. 황진이를 예인으로 키우기 위해 자신이 퇴기가 될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다. 황진이를 위해서라기보다 학춤을 전수하고 예술을 지키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권력을 탐하는 기녀, 매향(김보연)

여악행수 매향은 권력을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제자 부용에게 “권력을 사로잡는 것이 먼저, 재주는 그 다음”이라며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고 가르친다. 백무와 경쟁관계지만 누구보다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백무를 얕잡아 말하는 제자에게 “백무가 재주가 기녀의 전부인 줄로 아는 반편이만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는 백무의 것”이었다고 호통을 친다. 앞에서는 낯간지러운 칭찬을 늘어놓다가도 돌아서면 음해를 일삼는 보통의 주인공들과는 다르다. 김보연은 “매향은 상대를 인정할 줄 안다는 점에서 멋진 여자”라고 말했다.

매향은 부용이 첫날밤 벽계수에게 여악행수 자리를 달라고 했다가 소박맞자 나이든 주정뱅이를 들여보낸다. 울면서 거부하는 부용에게 매향은 “기녀는 마음줄을 함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라며 “진흙밭에서도 미소를 지을 줄 알아야 기녀”라고 가르친다. 가르침의 한편에는 자신의 자리를 내다본 것에 대한 응징이 담겨있다.

◇변화된 스승상

같은 사극이지만 이들의 사제지간은 무조건 희생하고 뒷바라지하던 기존의 관계와는 다르다. 겉으로는 엄하면서 속으로는 한없이 제자를 아꼈던 드라마 ‘대장금’ 속 한상궁보다는, 끊임없이 제자의 자질을 시험하며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성공에의 욕구를 부추긴다는 점에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에 가깝다.

제자 황진이와 부용은 스승들의 악랄함에 치를 떨면서도 위험한 승부에 뛰어들며 스승을 닮아간다. 복수든 무엇이든 황진이를 움직이는 건 사랑에 눈까지 멀어 눈물로 애원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그의 끼를 알아본 백무다. 매향이 백무보다 더 독한 줄 알면서도 황진이는 그의 밑에 들어가 온갖 고생을 참아내며 춤을 배운다. 부용 역시 백무를 찾아가 “내 춤을 보여줄 테니 학춤을 전수해달라”고 설득한다.

◇배우 김영애, 배우 김보연

김영애와 김보연은 친한 언니, 동생 사이다. 김영애는 “같이 한 번 해보자”며 사극출연을 망설이는 김보연을 설득했다. 김영애 본인도 실은 ‘서른살만 넘어도 퇴기였다는데 50대 중반에 매력적인 백무를 연기할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 올해 연기 생활 35년. 이제 그의 연기에 의심보다 안심할 이들이 많지만 그는 부족하다며 아쉬워했다. 김영애는 “대사NG는 안내지만 대사만 외운다고 끝나는 게 아니지 않으냐”며 “한장면 끝낼 때마다 찜찜하고 아쉽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선지 집중력도 떨어지는 것 같고 화면 속 내 얼굴이 참 많이 늙었구나 생각하지만 그래도 뭔가 많은 것을 담은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 때는 지난 시간이 억울하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당당하고 솔직한 매향이 현대에 태어났으면 더 어울렸을 것 같다”는 김보연은 모차르트 같은 백무와 살리에르 같은 매향 중에 어느 쪽에 가까운지 묻자 대번에 “살리에르”라고 말했다. “일부러 연구한 것도 아닌데 황진이 대본만 쥐면 낮고 굵은 매향의 목소리가 나온다”면서도 “99% 연습이 안되면 촬영장에 못나간다”고 했다. 인터뷰 도중에도 그의 손에 들린 대본은 군데군데 찢겨지고 더러워졌다. 밥을 먹으면서도 “리허설인데 대사를 빨리 외워야 한다”며 조바심을 냈다. “후배들 앞에서 해야되니까 더 긴장된다. 연기는 조금만 게을러도 금방 티가 나니까….”

황진이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무슨 일을 했을 것 같냐고 묻자 둘 다 “연예인은 안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학자들을 능가할 정도로 재능있고 천하의 풍류랑 벽계수를 농락할 정도로 대범한 여자가 왜 연예인을 하겠냐며 교수나 작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황진이 역의 하지원이 “재주가 많으니 연예인을 하지 않았을까요”라고 되물었던 것과 비교됐다. 스타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두사람이지만, 그들에게 배우는 그저 즐겁기만 한 생활은 아닌 걸까.

3년여 만에 연기생활을 재개한 김영애는 전재산 환원 발언으로 심한 속앓이를 하기도 했다. “내 나이가 올해 쉰다섯이다. 내가 하는 말의 무게를 알 나이다”라며 “남을 돕는다는 말조차 꺼려지는데 내가 뭐라고 감히 환원이라는 말을 하겠나”라고 말했다. 그는 “하지도 않은 말이 보도됐다”며 “큰 맘먹고 다시 연기를 시작했는데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 서글펐다”고 말했다. 그는 극중 기녀들이 황토팩을 사용해 간접광고 논란이 인 것에 대해서도 “극중 소품이 갑자기 물에 개어지지 않아, 스태프가 추석때 (내가) 선물했던 것을 급하게 쓴 것이었다”며 “나도 몰랐다”고 해명했다.

김보연은 “요즘은 한두작품만 찍어도 스타가 되고 조금만 뜨면 팬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며 “60대 나이에 6개월간 탭댄스를 배워 ‘시카고’같은 멋진 작품을 만들어낸 리차드 기어와 아이 낳고 쉬는 동안에도 열심히 활동하며 팬들에게 자신을 알리는 줄리아 로버츠처럼 더 열심히 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은 “배우도 여자”라고 말했다. 김영애는 “남편이 나를 사랑한다고 확인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며 웃었다. 김보연도 “남편에게 사랑받으니 모든 일이 다 잘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남자의 사랑 따위는 필요없다”고 말하는 극중 인물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김영애와 김보연은 백무와 매향의 심정을 백번 이해하지만 그들처럼 살기는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김영애는 “이 여자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찡하다”고 했다.

아름다워 보이지만 위험한 가시를 숨기고 있고 그 가시에 언젠가 스스로 찔리게 될 기녀들의 기구한 운명을 그들은 속 깊이 이해하고 있는 듯 보였다.

〈장은교기자 ind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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