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인터뷰

‘부러진 화살’ 김명호 교수 “재판관 태도? 실제가 영화보다 심해”

2012.01.26 16:21 입력 2012.01.27 16:38 수정

2007년 1월 일명 ‘석궁테러’로 불리며 언론에 연일 떠들썩하게 보도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부러진 화살>이 흥행가도를 달리며서 이 사건의 진실을 둘러싼 공방이 재점화됐다. 대학 본고사 수학문제의 오류를 주장한 뒤 1995년 교수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한 김명호 전 성균관대 조교수(55)가 복직소송에서 패소하자 당시 재판장이던 박홍우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현 의정부지법원장)에게 석궁을 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사법부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법원이 증거를 조작했고 재판이 불공정하게 진행됐다는 논란이 있었지만 김 전 교수는 4년형을 살고 2011년 1월 출소했다. 이 사건이 ‘제2의 도가니’로 번질 것을 우려한 법원은 영화가 개봉되기 전에 사실관계를 정리한 해명자료를 각급 법원 공보판사들에게 배포해 조기 차단에 나섰고, 지난 25일에는 교수 지위 확인 소송에 항소심 주심이었던 이정렬 창원지법 부장판사가 법원 내부게시판에 당시 재판과 관련한 해명글을 게재하기도 했다.

지난 25일 이 사건의 주인공 김명호 교수를 서울 흑석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법원과 이정렬 부장판사의 해명은)모두 거짓말”이라며 반박했다.

[단독 인터뷰] ‘부러진 화살’ 김명호 교수 “재판관 태도? 실제가 영화보다 심해”

“사건 당일 박홍우가 입은 와이셔츠를 노모가 중요성을 모르고 빨아서 혈흔이 사라졌다는 얘기는 재판과정에서는 나오지도 않은 궁색한 변명입니다. 1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박홍우는 (이유를)모른다고 했거든요. 또 이정렬은 재임용 거부 결정이 3월1일자여서 저를 위해 변론을 재개했다가 판결이 뒤집혔다고 주장하는데 일반적으로 교수 임기가 2월말로 끝나기 때문에 3월1일자를 임용 시작날짜로 하는 것은 관례이므로 이 역시 거론할 가치도 없는 변명이지요.”

그는 “영화 내용은 성폭행 장면을 제외하고 거의 100% 사실에 부합한다”며 “오히려 법정에서 재판관들이 보인 태도는 실제가 영화보다 훨씬 더 심했다”고 말했다.

“제가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라고 했다고 감치 7일을 받은 것도 안 나왔어요. 이 사건은 대법원 주도 하에 조작된 겁니다. 재판부는 사건 당일 박홍우의 통화기록을 증거보전해달라는 18번에 걸친 저의 청구도 전부 기각했지요. 전 그때부터 법원의 증거조작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또 제가 박홍우 옷가지에 묻은 혈흔이 박홍우 피와 일치하는지에 대한 혈흔검증 신청을 수십차례 한 것도 전부 묵살했습니다. 다 위법이지요. 성폭행은 아니었지만 그에 버금가는 압박을 받은 건 사실입니다. 춘천교도소로 이송될 때 2008년 없어진 제도임에도 알몸검신을 당했고 이에 저항하자 되레 제가 알몸검신당했다고 말한 게 허위사실 유포라며 징벌을 먹였죠. 면회금지 등 외부와 완전히 차단하고 교도관들도 저를 괴롭혔습니다. 제가 골치아프니까 판사들이 밑의 놈들 시켜서 나를 좀 손보라고 한 것이겠지요.”

그는 재판 과정에서 위법했다고 판단한 판사 수십명을 고소했다. 이와 별개로 2011년 1월 만기 출소할 때까지 그가 낸 헌법소원만 해도 무려 500여건에 달한다. 이중 99%가 사전심사에서 위법하게 각하됐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석궁사건의 항소심 재판장었던 이회기 판사는 재판 직후, 혈흔 감정을 위한 민사 재판의 재판장이었던 지영철 판사는 재판을 열기도 전에 사표를 쓰고 변호사가 됐다.

김 전 교수는 재판일지를 포함한 석궁사건 전 과정을 2006년부터 자신의 홈페이지(www.seokgung.org)에 상세히 기록해왔다. 홈피에는 2006년 그가 대법원 앞에서 1위시위를 하던 중 이용훈 당시 대법관이 승용차요일제를 지키지 않는 사진 등 위법사항이라고 판단되는 내용을 법조인들의 실명과 함께 거론하고 있다. (인터뷰할 때도 분노 때문인지 판사들을 거론할 때만은 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는 “출소후 쓰기 시작한 <판사 니들이 뭔데>을 곧 출간할 예정”이라고 했다.

“제가 석궁사건을 일으킨 것이나 책을 쓴 목적은 법원 판사들이 왜 양아치, 조폭집단인지, 그들이 어떤 수법으로 국민들을 우롱하고 탄압하는지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사법고시에 패스하는 순간 자신들은 법을 안 지켜도 되는 권리를 지녔다고 믿는 집단입니다. 석궁사건 직후 경찰차로 이송중에 제가 방송국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보도해달라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지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원장급 이상, 검사장급 이상, 헌법재판관은 국민들의 선거로 뽑아야 하고, 판사들이 법을 위반해 재판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일이 없도록 이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정봉주 전 의원을 허위사실 유포 및 명예훼손으로 구속한 것은 형법 124조 불법체포감금죄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과거 판례에 따르면 허위사실을 유포해서 명예를 훼손했다는 죄가 성립되려면 일단 이것이 허위사실인지, 또 유포한 사람이 그것이 허위사실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검찰이 입증해야 합니다. 따라서 설령 허위사실이라고 해도 정봉주씨가 이를 철썩같이 진실로 믿으면 허위사실 유포가 안되는 것이지요. 감옥에서 <미국헌법과 인권의 역사>라는 책을 읽어보니 이것은 1964년 뉴욕타임즈 대 설리반 사건이라는 판례를 우리가 베낀 것입니다. 불법체포감금죄를 범한 이상훈 대법관도 고소할까말까 생각중입니다(웃음).”

그는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했다. 이어 “법원 판사들은 나를 석궁으로 위협한 정도가 아니라 나를 죽였기 때문에 헌법 전문에 보장된 국민저항권 차원의 정당방위”라고 말했다.

“단지 판결에서 패소했다고 석궁을 들고 갔다면 저의 죄를 인정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전에 1년6개월간 교육부, 대법원 앞 시위 등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다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습니다.”

[단독 인터뷰] ‘부러진 화살’ 김명호 교수 “재판관 태도? 실제가 영화보다 심해”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34세에 성균관대 조교수로 임명된 전도유망한 수학자였던 그는 1995년 교수 지위확인 소송 패소 후 한때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그러다가 2005년 1월 사립학교법 개정으로 재임용이 거부된 교원이 교원소청심사위원회에 재심청구나 법원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되자 다시 교수지위 확인소송을 내기 위해 3월 귀국했다. 거듭된 좌절을 겪은 마당에 한국을 떠나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떠나고 싶어 1996년 뉴질랜드로 이민도 가고 미국에서 직장에도 다녀봤지만 자기 나라에서 버림받은 것이 알려진 나는 외국인들 눈에는 값싸게 노예처럼 부려먹기 좋은 먹잇감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97년 유력 과학잡지 <사이언스>는 김명호 교수를 옹호하며 ‘올바른 답의 비싼 대가?’라는 기사를 실었다. 해외에서도 그의 사연을 알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는 “복직투쟁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또 “복직을 위해 성균관대와 싸우다보니 법원이 성대 뒤를 봐주는 것을 알게 됐고 그래서 논리로 먹고 사는 법원 판사들을 논리로 친 것”이라며 “법원이 바뀌면 성대 문제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많은 것들이 제대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그가 꿈꾸는 사회는 어떤 곳일까. 돌아온 말은 간결했다. 그는 “내가 법과 원칙을 지키면 윗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나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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