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 때까지 탄 단풍은 물론 푸른 잎마저 말라 떨어져, 정교하게 드러난 나뭇가지 사이로 삭풍이 휘이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뒤늦게 “지속적 침체”(secular stagnation)라는 이름을 단 세계 경제 속에서 그나마 활력을 유지하던 동아시아에도 겨울바람이 불어오는가.
일본 내각부는 지난 17일 3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전분기 대비 0.4%(전년 동기 대비 -1.6%)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2분기의 1.8% 감소(전년 동기 대비 -7.3%)에 연이은 마이너스 성장이다. 아베노믹스에 환호하던 국내의 보수지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아베 총리는 중의원을 해산하고 더 적극적인 재정정책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구했다.
중국의 인민은행은 지난 21일 금융기관의 대출 및 예금 금리를 각각 0.4%포인트와 0.25%포인트 내리고, 예금금리 적용 상한을 기준 금리의 1.1배에서 1.2배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던 경제성장률 7%마저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초이노믹스”는 슬그머니 퇴장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부임하자마자 기자들 앞에서 생색을 냈던 주가는 곤두박질쳤고, 최경환 부총리가 잔뜩 기대를 걸었던 부동산 경기는 일부 지역에서 반짝했을 뿐 갈지자 걸음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보수지 월스트리트저널마저 “한국의 혼란스러운 경제정책”이라는 제목으로 초이노믹스를 아베노믹스의 이복동생이라고 단정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엉뚱한 해석과 위기를 악화시킬 해결책이 튀어나오고 있다. 이름만 그럴싸한 “구조 개혁”이 그것이다. 최 부총리는 초이노믹스를 “근혜노믹스” 뒤에 숨기고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중심으로 구조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서비스산업 규제 완화, 공공부문 ‘개혁’, 노동시장 유연화, 임대시장 활성화 그리고 해외순방의 성과라고 발표한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이 그것이다. 말 그대로 “줄푸세”로의 회귀이다. 보수 경제지들은 한발 더 나아가 세금을 인하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규제 완화와 민영화, 개방이 세계의 “장기 침체”를 낳았는데 바로 그 정책을 더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1993년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가 터졌을 때 해운산업의 규제 완화를 추진해 결국 세월호 참사를 불러온 것과 똑같은 일이 더 큰 규모로 되풀이되고 있다.
나는 단기적인 경기대책으로 금융을 완화하고 재정을 늘리는 데 찬성한다. 하지만 장기적인 개혁의 방향은 정반대로 가야 한다. 중국처럼 단기적인 확장정책을 쓰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내수의 확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새누리당과 정부의 전매특허가 하나 생겼는데 “말 따로, 행동 따로”가 그것이다. 지난 대선 때 박근혜 후보는 “경제민주화”와 “맞춤형 복지”를 내세워 당선됐다. 하지만 경제민주화는커녕 규제 완화와 민영화로, 복지는커녕 서민증세로 오히려 내수를 축소시키고 있다. 최경환 후보는 인사청문회에서 “소득 주도 성장”을 내비쳤지만 실제론 “부채 주도·수출 주도 성장”으로 일관하고 있다.
중국마저 성장률이 떨어지는 가운데 수출이 획기적으로 늘어날 리 없고, 수출 전망이 어두운데 대규모 투자를 단행할 기업은 없다. 결국 소비를 늘릴 수밖에 없는데 정부는 가계부채를 확대하는 정책으로 오히려 소비를 옥죄고 있다. 돈이 밑으로 돌게 하는 아래로부터의 성장, “소득 주도 성장”이 장기적으로 올바른 방향이다. 주거와 의료, 교육의 공공성 강화로 서민들의 소비여력을 만들어주고 생태경제로의 전환을 위한 대규모 투자를 과감하게 시행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줄푸세와 부채 주도 성장은 최악의 정책 조합이다.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불기 시작한 삭풍은 나무를 뿌리째 흔들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