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엔테스가 왔다!

2017.12.25 21:03 입력 2017.12.25 21:17 수정

모…? 누구? 2002 한·일 월드컵 8강전으로 돌아가 보자. 전후반 0-0으로 마친 한국과 스페인. 하마터면 연장 전반에서 스페인의 골든골로 끝날 뻔했다. 호아킨 산체스가 이을용의 팔을 뿌리치고 우측면 깊숙이 파고들면서 크로스를 올린다. 상대 문전 맨 앞에서 억만분의 1의 확률을 뚫고 헤딩 슛을 터트려온 모리엔테스가 한국 골문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그때 골라인 아웃 판정을 알리는 심판 휘슬이 울리고, 허탈하게 돌아서는 모리엔테스.

[정윤수의 오프사이드] 모리엔테스가 왔다!

그가 서울에 왔다. 그는 혼자 오지 않고 스페인 라리가의 모든 홍보 역량을 업고 왔다.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의 경기, 이른바 ‘엘 클라시코’가 열리는 것을 계기로 하여 마치 전후반 90분 경기에서 정확한 전술 지침에 맞춰 공격을 개시하듯이 방문했다. 양팀의 국내 팬 300명과 함께 ‘뷰잉 파티’를 겸하여 경기 초반을 함께 지켜봤다.

라리가는 시즌 최고의 경기인 두 차례의 엘 클라시코 중 하나를 아시아 지역 시청 시간에 맞춰 편성하기로 했다. 그래서 토요일 저녁 9시! 한국 팬들이 시청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대에 메시와 호날두가 마드리드에서 격전을 벌이고, 그들의 대선배인 모리엔테스는 서울의 강남에서 함께 열광의 순간을 만든 것이다. “It’s not football, it’s LaLiga”라는 슬로건으로 극동아시아까지 진출하려는 스페인 프로축구의 압박 작전이다. 자신들의 최고 경기를, 가히 지구상 최고의 빅매치라고 불리는 ‘엘 클라시코’를, 현지시간 토요일 낮 1시에 과감히 편성하면서까지 그야말로 전진 압박을 전개한 것이다.

국내의 일부 스포츠 전문 방송사에서도 라리가를 포함한 유럽 축구를 ‘유료화’하는 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유료화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을 덜기 위한 일종의 ‘미끼’ 전략으로 엘 클라시코가 한국 팬들이 가장 선호하는 시간에 편성되고 모리엔테스까지 ‘상대방 골문’ 깊숙이 들어오는 마케팅이 펼쳐졌는데, 중요한 것은 국내 팬들의 반응이다. 밤 9시가 되자 서버에 과부하가 걸릴 정도였고 인터넷의 각 포털에서는 어떻게 하면 엘 클라시코를 볼 수 있느냐는 질문들이 빗발쳤다.

사실 한국은 얼마 전까지 각종 문화 콘텐츠를 ‘무료’나 ‘공짜’ 또는 ‘어둠의 경로’로 즐기는 것을 당연시해왔다. 그러나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고급 콘텐츠에 대한 구매 의사가 증가했으며 무엇보다 어려서부터 ‘유료’ 게임을 즐긴 세대가 문화 콘텐츠의 가장 왕성한 구매자 집단으로 성장하면서 ‘무료’나 ‘공짜’는 오히려 ‘수준 이하의 콘텐츠’이거나 ‘제 살 깎아먹기’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당연한 수순이다. 한때 국내 프로스포츠는, 어지간하면 ‘공짜’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식된 적도 있었다. ‘2 플러스 1’도 있었고 무슨 제휴 카드를 쓰면 된다든지, 하여간 ‘공짜’라도 해서 관객을 모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천만의 말씀이다. 그래서도 안되고 그럴 수도 없다. 당연히, 그 땀방울에 걸맞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렇게 받은 비용으로 더 수준 높은, 더 활력 있는, 더 다양한 콘텐츠와 서비스가 제공되는 것이 타당하다.

평창 동계올림픽도 마찬가지다. 개막 40여일을 앞둔 연말 현재, 입장권 평균 판매율이 61%를 넘어섰다고 한다. 인기 종목인 알파인스키 판매율은 81%, 쇼트트랙은 74%라고 한다. 그런데 조직위에서는 ‘노쇼’ 현상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한다. 기업과 지자체에서 대량 구매하여 배포한 비인기 종목이나 패럴림픽의 ‘공짜 티켓’에 대한 걱정이다. 성백유 조직위 대변인은 자원봉사자 2만명을 동원해 노쇼에 따른 빈자리를 즉각 채울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한다.

그 절박함을 이해하면서도 약간은 ‘웃픈’ 느낌이다. 86아시안게임 때도 그랬고 88올림픽 때도 그랬다. 중·고교 학생들이 대거 자리를 채웠다. 지금도 그러해야 하다니, 안타깝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평창 올림픽의 의미를 문화적으로 다르게 해석하고 각각의 경기들이 지닌 묘미를 콘텐츠 차원에서 알려야 한다. 지난 23일, 이희범 조직위원장과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최문순 강원도지사, 김연아 홍보대사 등이 서울 방이동에서 평창 행사를 했다. 개별 행사의 의미는 있지만 그 형식이 진부하고 내용 또한 동어반복이다. 24일에는 평창 올림픽 홍보대사 위촉식이 열렸다. 그 또한 마찬가지다. 행사를 위한 행사처럼 보인다.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린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3수 끝에 개최하게 됐고 강원도 발전에 지렛대가 된다는 것도 이젠 다 안다. 그런 얘기를 여태 한다.

정윤수 스포츠 평론가·성공회대교수

정윤수 스포츠 평론가·성공회대교수

아직 모르는 게 있다. 알파인스키 활강 최고 속도가 시속 161㎞를 넘는다. 그 순간 선수의 심장은 어떻게 쿵쾅거리며 저 아래 소실점으로 보이는 세상은 어떤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봅슬레이, 루지, 스켈레톤의 3대 썰매 종목은 시속 120㎞ 이상으로 질주한다. 그 엄청난 스피드 속에서 느끼는 인간의 공포감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쇼트트랙의 계주 장면을 떠올려보라. 16명의 선수들이 비좁은 아이스링크를 쾌속으로 돌면서 절묘하게 서로의 몸을 밀어준다. 그때, 동료의 손이 자신의 몸에 착 붙어서 내 몸을 저 앞으로 밀어줄 때, 그 찰나의 순간에 어떤 느낌이 드는지, 우리는 모른다. 컬링은 어떠하며 피겨는 어떠한가, 우리는 모른다. 생각해 보라, 인간이, 새도 아니면서, 200m 이상을 훨훨 날아가는 저 스키점프 선수들의 가장 짜릿한 순간은 어떤 느낌인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선수들은 알고 있다. 이제 선수들과 전문가를 통하여, 바로 그 스포츠의 본질을 알려야 한다. 애국심으로 자리를 채우던 시대는 지나갔다. 수많은 종목의 수많은 선수들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경험할 수도 없고 견딜 수도 없는 경지에서, 어떤 감각과 가치를 느끼는지, 그 비범한 세계를 알려야 한다. 동계올림픽은 결국 선수들의 몸으로 빚어내는 향연 아닌가. 콘텐츠, 그 자체가 볼 만하다면 기꺼이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시대 아닌가. 애국심이나 애향심이 아니라 인간이 빚어내는 비범한 순간과 짜릿한 감각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그것을 알려 달라. 그러면 노쇼는 걱정 없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