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책 한 권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고등학생 때 읽었던 <전태일 평전>을 손에 꼽는다. 이 책은 내가 태어나던 해에 자신의 몸을 불태워 개발 근대의 노동 착취에 항거했던 한 젊은 노동자의 짧은 생애에 관한 책이다. 이 책에는 두 권의 의미 있는 책이 등장한다. 하나는 통신교육용 교재 <중학1>이고, 다른 하나는 <근로기준법해설서>이다.
1967년 2월 전태일은 재단사로 승진한다. 시다 일을 하던 때와 비교해 경제적 여건이 조금 나아지면서 그는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석유곤로 등 세간살이를 팔아 중고등통신강의록 <중학1>을 구입한다. 그는 일기에 “남은 다 하는데 나라고 못할 리가 어디 있어 해보자. 그리고 내년 3월 달에는 꼭 대학입시를 보자. 앞으로 376일 남았구나 1년하고 10일 재단을 하면서 하루에 저녁 2시간씩만 공부하면 내년에는 대학입시를 보겠지. 해보자. 해라”라고 썼다. 그에게 배움이란 가난과 못 배운 자에 대한 설움을 털어낼 수 있는 기회였으며, 사회의 일원으로 떳떳하게 입신양명할 수 있는 도전이었다.
그러나 전태일이 꿈꿨던 자기계발의 강렬한 소망은 엄혹한 노동현실 속에서 성취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꿈이었다. 자신도 가난했지만, 주변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조건과 환경에 시달리며 쓰러져가는 것을 지켜만 볼 수 없었던 그는 노동운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 무렵 전태일은 ‘근로자의 생활을 보장하고 향상’시키기 위한 근로기준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어머니에게 빚을 내어 책 한 권을 사달라고 졸랐다. 그 책은 어느 노동법학자가 쓴 <근로기준법해설서>였다. 노동자를 위한 법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전태일은 한 가닥 희망을 품었다. 그날 이후 그는 시간만 나면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주먹은 법보다 가까웠다. 전태일은 1969년 6월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바보회’를 만들어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을 조사하며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알리고 다녔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태일은 해고되었고, 다시는 평화시장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다. 법과 국가에 대해 소박한 믿음을 품었던 전태일은 분신을 결심하기 전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했었다. 대통령께 드리는 편지 속에서 그는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서 아픈 곳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라고 썼다. 이 땅의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참혹한 현실에 대해 대통령이 알게 된다면, 이런 사실이 사회에 알려진다면 노동청의 근로감독관이 외면했던 문제가 해결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편지는 끝끝내 전해지지 않았다.
1970년 11월13일, 전태일은 그가 희망을 걸었던 ‘근로기준법’에 대한 화형식을 벌이려고 했다. 경찰의 방해로 시위가 무산되려는 상황에 처하자 그는 스스로의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쓰러졌다. 그로부터 어느덧 반세기가 흘러가고 있다. 그사이 또 한 명의 노동자가 대통령을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역시 대통령을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처참하게 숨졌다. 그 외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최근 5년간(2012~2016) 노동자 10만명당 치명적 산업재해 수에서 한국은 2위인 멕시코 8.50명보다 높은 11.35명으로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저는 우리나라를 저주합니다”라고 노동자의 어머니가 절규한다. ‘김용균법’이 통과되었다한들 이 국가, 이 사회가 젊은이의 희생, 노동자의 목숨을 갈아 넣어야만 돌아가는 살인기계인 이상 멈출 리 없다. 법안이 통과되자마자 기업 경영하기 어렵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들조차 ‘김용균법’보다 더 철저하게 지켜져야 할 ‘근로기준법’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노동자라면,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법은 이미 존재한다. 다만 없는 자에게는 가혹하고, 가진 자에게는 너그러운 법이, 그런 국가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