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를 먹지 않는 시민

2021.05.10 03:00 입력 2021.05.10 03:05 수정

소의 해를 살아가며 질문한다. 한국인은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소를 많이 먹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풍성한 대답을 해준 곳은 동물권 잡지 ‘물결’이다. 두루미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물결’은 이번 봄호에 소를 특별 주제로 다루며 식용우를 둘러싼 시스템과 태도를 다각적으로 탐구하는 글들을 선보인다. 그중 하나인 동물해방물결 이지연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 소 축산업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축산업은 무역협정, 정부 정책, 기업에 의해 빠르게 대규모로 확산되어 왔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196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에 가입한 뒤 한국은 미국 거대 곡물 기업이 생산한 잉여농산물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싼값에 들여온 그것들을 소진하기 위해 국내 사료산업이 생겨났다. 잉여농산물이란 대두와 옥수수다. 대부분 축산농가가 동물에게 먹이는 사료로 쓰인다. 미국이 과잉 생산한 곡물을 소진하기 위해 만든 사료산업 때문에 축산업도 함께 커졌다. 1968년 박정희 정권의 ‘축산진흥 4개년 계획’ 또한 소를 본격적으로 먹게 된 흐름에 일조한다. 이 역사에서 가장 큰 혜택을 누린 곳은 기업이다. 하림, 카길, 제일제당, 대한사료 등 사료 업체는 사료부터 시작해 동물 품종 개량, 사육, 육류 가공 및 유통 등 전 영역을 아루르는 곡물·축산 복합체가 되었다.

한국에서 고기용으로 사육되는 소는 꾸준히 늘어왔다. 1970년에는 131만마리였고, 2010년에 335만마리를 기록한 뒤 줄어들지 않고 있다. 한편 소 농장은 계속해서 감소해왔다. 1990년에 62만개였던 소 농장은 2019년에 이르자 10만개 미만이 되었다. 소 1마리당 투여되는 노동시간은 반으로 줄었다. 이 수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공장식 밀집사육이다. 더 많은 소들이 더 좁은 공간에서 더 빠르게 도살된다는 뜻이다. 이지연 대표는 말한다.

GATT 가입 후 값싸진 사료에
한국 축산업도 ‘폭발적인 성장’
공장식 밀집사육 시스템 고착화
의인 아니어도 변화 만들 수 있어
함께 육식 줄여나갈 동료 필요해

“1967년부터 현재까지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본디 초식동물인 소들은 이 땅에서 점차 토지를 박탈당했고, 풀이 아닌 똥이 가득 찬 시멘트 바닥에서 사육되기 시작했다. 적게 먹어도 금방 살찌게 조작당했으며, 어미소는 강간을 통한 강제 출산과 새끼 빼앗기기를 반복하게 되었고, 황색이든 흰색이든 얼룩무늬든 너나없이 모든 소들은 인간의 입에 들어갈 것을 생산하기 위해 탄생되고, 착취당하며, 도살되었다. 인권에 이어 동물의 권리와 해방 철학이 발전된 지금, 우리는 이 중 어떤 행위도 허용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이 거대한 고통의 세계를 모르지 않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축산업 말고도 신경쓸 일이 너무 많은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작가 강남규는 그의 저서 <지금은 없는 시민>에서 ‘시스템주의자’와 ‘의인’에 관해 이야기한다. 시스템주의자는 “어떤 위기를 극복할 책임은 시스템에 있으니 자신에겐 뭘 요구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사람이다. 그 반대편에 있는 의인은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위기 상황에서 누구보다 앞서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의인의 이야기를 전해듣길 좋아하는 동시에 시스템주의자처럼 말하길 좋아한다고 강남규는 통찰한다. 그가 주목하는 건 시스템주의자와 의인 사이의 시민들이다.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공백의 영역에 시민들이 자리한다. 의인처럼 해낼 여유가 없는 시민들도 문제적인 시스템을 바꾸는 일에 동참할 수는 있다. 선의를 모으고 책임을 나누고 서로의 부담을 덜어줄 수도 있다. <지금은 없는 시민>을 통해 강남규는 서로에게 좋은 변화의 계기가 되는 시민의 존재와 그들 사이의 연쇄 작용을 희망한다.

성실하고 따뜻한 강남규의 사유를 동물권과 기후위기를 마주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적용해보고 싶다. 축산업이 저절로 바뀔 때까지 기다리는 시스템주의자들의 세계에서는 이전과 같은 갈등과 고통이 영원히 되풀이될 것이다. 그렇다고 최전선에서 환경운동과 동물권운동을 전투적으로 해나갈 용기와 여력이 모두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양극단처럼 보이는 둘 사이에 무수한 시민들이 있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당신들도 그런 시민들이다. 우리는 어디에나 있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던 고기를 안 먹거나 덜 먹기로 다짐하고 실천하는 것은 결코 미미한 변화가 아니다. 시민들의 메뉴 선택과 공장식 축산 시스템은 상호작용한다. 시민이 구매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고기는 끔찍하게 생산된다. 생산된 고기를 시민이 먹는다. 같은 이유로 고기가 또 생산된다.

이 사슬을 끊는 결정적인 행동이 불매다. 동물의 살과 뼈와 젖에 최대한 돈을 쓰지 않는 것.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일이다. 함께 육식을 줄여나갈 더 많은 동료 시민이 필요하다. 축산업의 역사와 소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한 뒤 고기 소비를 줄여 나가는 시민들을 상상하고 있다. 지금은 없는, 그러나 다가올 시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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