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방송인이 더 과감할 수 있도록, 세상의 기준을 바꾸다

2020.06.19 16:07 입력 2020.06.19 16:09 수정
칼럼니스트 위근우

MBC every1 <비디오스타>, 선배 여성 연예인들과 함께한 200회 특집

지난 6월9일과 16일 방영한 MBC every1 <비디오스타> 200회 특집은 ‘레전드’라 불리는 여성 연예인 게스트 3인방(강부자, 혜은이, 이성미)과 동시대 여성 방송인 4인(박나래, 김숙, 박소현, 산다라 박)의 연속성과 유대감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난 6월9일과 16일 방영한 MBC every1 <비디오스타> 200회 특집은 ‘레전드’라 불리는 여성 연예인 게스트 3인방(강부자, 혜은이, 이성미)과 동시대 여성 방송인 4인(박나래, 김숙, 박소현, 산다라 박)의 연속성과 유대감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진짜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지난 6월9일과 16일 2주에 걸쳐 방영한 MBC every1 <비디오스타> 200회 특집(정확히는 200·201회)에 출연한 가수 혜은이는, 앞트임을 했다가 눈이 하나가 될 뻔했다고 너스레를 떨며 본인의 성형 경험을 시간순으로 정리해 이야기하는 박나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말을 이렇게 쉽게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라며 격세지감을 드러낸 그는 박나래를 향해 “대단해, 박나래 대단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혜은이의 말대로 세상은 많이 변했다. 당연하다. 그는 1975년에 데뷔했다. 함께 게스트로 출연한 배우 강부자는 1960년대에 드라마를 생방송으로 찍었던 경험을, 역시 함께 출연한 개그우먼 이성미는 본인처럼 작은 체구의 여성을 포켓용 트랜지스터라디오에 빗댄 ‘트랜지스터걸’이라는 별명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번 <비디오스타> 200회 특집이 흥미로웠던 건, 오랜 경력을 자랑하는 여성 연예인 게스트 3인방과 동시대 여성 방송인 사이의 거리를 확인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세상이 많이 변해온 그 과정에서 이들 선배와의 연속성과 유대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여성 MC만으로 구성된 흔치 않은 정통 스튜디오 토크쇼로서 지난 4년 동안 자리를 지킨 <비디오스타>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이러한 계보를 확인하는 건 그래서 상징적이다.

물론 방송에서 비교한 것처럼 혜은이가 젊은 시절 직접 디자인한 마린룩이 소녀시대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그가 수십년 뒤 걸그룹의 패션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다만 ‘원조 ○○’라는 개념이 남발되는 경향을 고려하더라도 그 스스로 자신했듯 그가 언니부대 팬덤의 원조로서 기존 여성 가수들보다 훨씬 역동적인 무대로 관객 반응을 이끌어낸 슈퍼스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비디오스타> MC인 산다라 박이 속했던 2NE1을 비롯한 2세대 걸그룹 제너레이션이 2000년대 초반 여성 가수들과 차별화되고 단절된 만큼이나, 1970~80년대 사이의 혜은이, 또 그 이후의 김완선 등의 등장 역시 앞선 세대와 차별화되는 방식으로 문화적 변동을 이끌었고 그처럼 변화하고 확장된 지평 위에서 새로운 시도들이 나올 수 있었던 셈이다. 최초의 여성 공채 코미디언인 이성미와 직속 후배나 다름없는 역시 공채 개그우먼인 MC 김숙, 박나래와의 연결고리를 찾는 건 더 쉬운 일이다. 김숙이 까마득한 선배인 이성미에게 대기실에서 거침없이 농담을 던질 정도로 서로 막역한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지만, 이성미와 직접적 친분이 없는 박나래도 과거 이성미와 박미선이 함께 무대에 선 모습을 보며 자신과 장도연 콤비를 떠올렸다. 박나래, 장도연 콤비가 김정식, 최양락의 ‘꺼꾸리와 장다리’에 더 직접적인 모티브를 따온 것과 별개로 지금까지 40여년 동안 우정과 방송 경력, 여전한 입담을 유지 중인 박미선, 이성미 콤비는 그 자체로 여성 예능인들에게 현재진행형의 롤 모델일 수밖에 없다(여담이지만 JTBC <1호가 될 순 없어>는 포맷과 별개로 박미선, 김지혜, 장도연을 중심으로 이러한 개그우먼들의 연대감을 잘 보여준다).

MC들 스스로 ‘레전드 특집’이라 칭했듯 화려하고 오래된 경력을 지닌 게스트들을 모은 자리인 만큼 노골적일 정도로 존경과 예우를 담아 진행된 방송이지만, 그 전설들이 MC들과 소통하며 동시대적 공감대와 유대감이 형성된 것은 그래서 당연해 보인다. 과거 박미선과 이성미가 모기약 광고를 양분했던 기사를 보며 김숙이 자신과 송은이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고 하자, 이성미는 “모기약(광고)이라도 잡고 있어야지”라며 자신의 뒤를 잇는 후배 개그우먼에 대한 동질감을 드러냈다. 마치 미리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게스트들이 경험한 고난의 형태가 단순한 육체적 고생이 아니라 부당한 루머의 문제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동기들에게 험담과 뒷담화를 하는 후배에게 그러지 말라고 충고했던 이성미는 그것을 PD에게 일러바친 후배 때문에 3개월 출연 정지를 당했고 졸지에 무서운 군기반장이라는 오명을 얻었으며, 강부자는 후배 여성 배우들과 재벌 간 성매매를 알선했다는 아주 오래되고 특정 세대에겐 정설처럼 퍼져 있던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자신들이 살아보니 루머에 굳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모습은 너무 세상사에 해탈한 듯해 쉽게 공감 및 동의하기 어렵지만, 데뷔 때부터 작곡가 길옥윤과의 스캔들에 시달렸던 혜은이는 그 시절의 마음고생에 대해 눈물을 글썽이며 고백하는 와중에도 “후배들의 가슴 아픈 소식을 접할 때마다 선배로서 뭘 좀 도와줄 수 없었을까” 고민했음을 밝혔다. 악플과 루머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고인들을 추모했던 수많은 발언들 속에서 선배이자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이야기한 건 적어도 방송에선 이번 <비디오스타>에서의 혜은이가 처음이다. 이것을 전원 여성 MC로 구성된 토크쇼에서 보게 됐다는 건 우연일까.

강부자, 혜은이, 이성미 모두 어느 토크쇼에 출연하든 잔뜩 풀어놓을 이야기보따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지만, 그들이 서로 선생님, 언니라는 표현을 쓰며 서로를 의지하고 신뢰하고 눈시울을 붉혀가며 진심을 드러내는 모습을 MBC <라디오스타>에서도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기본적으로 <비디오스타>가 게스트들이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토크쇼를 지향하기도 하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 스튜디오에 들어온 순간부터 강부자, 혜은이는 박나래와 김숙의 열정에 대해 깊은 애정을 고백했고, 질문 담당으로서 아직 토크 참여가 약간 부자연스러운 산다라 박에 대해 이성미는 “광 팔려고 들어올” 타이밍을 재는 것 같다며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게 받아들였다. 다시 말해 이미 서로에 대한 동질감과 호감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여성 연예인들끼리의 방송 안에서 서로 많이 다르지만 또 많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토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런 토크는 그 자체로 ‘진짜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여자 연예인도 웃통 까는 시대가 와야 해요”라는 박나래의 멘트에 강부자가 조금도 동의하지 못해도 괜찮다. 중요한 건 그가 MC로서 그렇게 말할 수 있고 다시 한번 강부자의 싸늘한 시선에도 트월킹을 출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강부자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점잖게 말렸고 적어도 혜은이와 이성미는 즐거워했다. 스핀오프라지만 사실 <라디오스타>의 마이너 버전처럼 시작했던 <비디오스타>가 이제 명백히 독립적인 브랜드 가치와 의의를 증명하는 건 이 지점이다. 여성 방송인들이 더 과감해질 수 있고, 그것이 조금씩 기준을 바꿔간다는 것. 강부자, 혜은이, 이성미의 시대에서 박소현, 김숙, 산다라 박, 박나래의 시대로 이어지는 연속성과 문화적 변화의 흐름처럼 <비디오스타>가 200회 동안 흘러온 과정 역시 그 자체로 시대를 조금은 변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그래서다. 첫 화에서 박나래는 자신과 김숙이 예능 대세가 되고서야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며 투덜댔지만, 2016년 당시 이미 예능 대세였던 그 둘조차 <비디오스타>에서 MC로 단련된 지금은 훨씬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다. 김숙은 단짝 송은이와 여성 중심 예능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가는 중이며 박나래는 지난해 MBC 방송연예대상을 수상했다. 결과론이지만 역시 MBC <무한도전>의 스핀오프인 MBC every1 <무한걸스>가 송은이, 신봉선, 김신영, 안영미, 김숙 등 현재 방송계를 누비는 여성 예능인들의 중요 전초기지가 되었다는 건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그렇기에 왜 이들 여성 중심 스핀오프는 지상파 MBC가 아닌 케이블에 마이너 버전의 형태로 제작 및 편성되는지, 정작 MBC는 왜 최근까지 남자만 10명 나오는 <끼리끼리>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가 주말 편성에도 1%라는 처참한 시청률로 종영했는지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진짜 세상이 많이 변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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