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끝나도 눈에 밟히는 캐릭터가 있다. 지난 21일 종영한 KBS 2TV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향미가 그렇다. 창문없는 술집 ‘물망초’ 마담의 딸로 태어나 평생을 주변인으로 살다간 사람. 지저분한 염색 머리에 벗겨진 손톱 매니큐어 등 향미를 더 향미답게 만든 디테일은 배우 손담비(36)의 치열한 고민에서 탄생했다.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손담비는 자신을 “노력을 안 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지저분하던 노란 머리는 검게 정리된 상태였다. “가수 할 때도 사랑받는 데 6년이 걸렸다. 연기도 그만큼 오래 걸릴 거라 생각했다”고 덤덤히 말하는 그는 마냥 무르지 않은 단단한 속내를 가졌다는 점에서 향미와 어딘가 닮아 있었다.
2007년 가수로 데뷔해 2009년 SBS 드라마 <드림>으로 연기 활동을 시작했고, “‘섹시 가수’라는 선입견의 벽을 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다”고 했다. “<동백꽃 필 무렵>은 인생 1막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며 “배우 엄정화처럼 가수와 배우를 넘나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손담비와의 대화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향미로 큰 사랑을 받았다. 기분이 어떤가.
“얼떨떨하다. ‘이렇게 사랑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묘하고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느낌이다.”
-주변의 반응이 궁금하다.
“주변 친구들부터 먼 친척들까지 저에게 문자를 보냈다. ‘향미 너무 소화 너무 잘했다’ ‘싱크로율 맞게 너무 잘 했다’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까불이가 누구냐’는 질문에 시달리기도 했다. 단순한 아르바이트생으로 여겼다가 키를 쥐고 있는 여인이라는 게 드러난 6회부터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향미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욕 먹을 수 있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연기를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도 ‘물망초’ 서사가 시작되면서 캐릭터에 많이 몰두해주시더라.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주지도 못하는 결손가정 아이가 동백이를 만나며 닮아가고 싶어하고 동경하는 모습, 그런 짠한 모습이 대중분들께 와닿은 것 같았다. 다행히 너무 불쌍하게 여겨주시고, 제가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해주셔서 감사했다.”
-캐릭터를 분석은 어떻게 했나.
“저는 외동딸인데다 살아온 삶도 많이 달라 공통점이 많지 않다. 그래서 캐릭터 분석을 더 철저히 했다. 향미는 천천히 곱씹으며 말하는 아이다. 맹하고 눈빛은 초점이 없는데, 눈치는 빨라서 멍청하지 않아야 했다. 말의 속도를 조절하기가 힘들었다. 높낮이 없이 천천히 말하다 한 방에 터뜨려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일부러 말을 천천히 하고 발음도 또박또박하려 노력했다. 다만 향미도 저도 단단해 보인다는 있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 부분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저도 처음부터 단단했던 건 아니고 10년 동안 연기를 하면서 단단해졌다. 단단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더라. 향미도 마찬가지 아닐까. 세월이 그를 단단해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고운이란 본명 대신 향미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삶에 우여곡절이 많다보니 고운이란 이름이 자신과 안 맞는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 고운이는 곱게 살아야 하는데, 향미는 그렇지 못하고 사랑을 갈망하지 않았나. 여기에 대해서도 분석을 해봤다.”
-<동백꽃 필 무렵> 초반에 연기력 지적이 있었다.
“엄청 속상했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여기서 흔들리면 대중에게 흔들리는 사람밖에 안 된다는 생각에 제 페이스를 끝까지 가져갔다. 언젠가 향미와 내가 만나는 지점이 생기겠지 생각했다. 다행히 그런 지점을 만났고, 향미 캐릭터를 이해해주셔서 내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느꼈다.”
-향미의 서사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이 정도일 줄은 모르고 들어갔다. 중요한 역할이고, 죽는 것까지는 알았는데 이렇게 내면을 깊숙이 건드리는 서사가 있는 줄은 몰랐다. 작가님이 글을 잘 써주신 덕이다. 작가님에 대한 신뢰도가 워낙 높아서 이렇게 중요한 인물인지는 몰랐지만, 좋은 캐릭터일 것이란 믿음은 있었다.”
-향미를 연기하는 데 있어 작가가 특별히 주문한 건 없었는지.
“그런 건 딱히 없었다. 잘 되고 나서부터 문자를 보내주시더라.(웃음) 12화 마지막 우는 씬이 끝나고 장문의 문자가 왔다. ‘그동안 우여곡절 많았다고 들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다 향미밖에 안 물어볼 정도로 잘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울면서 ‘좋은 글 써주신 덕에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었다’고 답한 기억이 난다.”
-드라마가 입소문을 타면서 현장 분위기도 달라졌을 것 같다.
“대본 유출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16화부터는 대본도 많이 가렸고, 향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선 쪽대본으로 처리됐다. 까불이가 누구냐에 대한 궁금증이 크다보니 배우들도 대본을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했다. 12화 대본을 잃어버렸는데, 다행히 유출은 안 됐다. 배우들은 까불이의 정체를 11화, 12화 대본이 나올 무렵 알았다.”
-공효진·오정세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
“효진 언니는 개인적으로 친해서 같이 하면서 편안함이 있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때? 저렇게 하는 건 어때?’ 하는 아이디어와 조언을 많이 해줘서 큰 도움이 됐다. 규태 오빠는 그냥 너무 웃겼다. 만나면 웃음 바다였다. 애드립 등 여러 준비를 많이 해오는 배우이다보니 너무 웃겨서 촬영이 중단 될 정도였다.”
-손담비는 ‘악바리’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노력파’인가.
“저는 노력을 안 하면 잘 안 나타나는 사람이다. 하나를 물고 늘어져야 나중에 빛이 나오더라. 가수 할 때도 우여곡절 많았다. 춤·노래도 못하던 애가 4년의 연습생 기간을 거쳐 솔로로 데뷔했고, 앨범 2장이 망해서 포기하고 싶을 때 ‘미쳤어’라는 곡을 만났다. 이 때도 6년을 노력했으니, 연기도 그만큼 오래 걸리겠구나 생각했다. 연기자로 돌아선 다음엔 ‘섹시 가수’ 선입견을 떨쳐내는 게 쉽지 않았다. 역할도 부잣집 딸, 센 역할만 들어왔다. 그래도 이미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란 생각을 하고 시작해서 흔들리는 건 없었다. 언젠가는 나의 캐릭터가 올 것이라는 믿음 하에 밀어붙였고, 지금 때를 만난 것 같다.”
-향미는 동백이를 만나며 삶의 의지를 찾았다. 손담비에게 동백이 같은 존재가 있는지.
“정려원 언니가 그런 존재다. 제가 난항을 겪고 있을 때도 언니가 옆에 있었고, 잘 됐을 때도 있었다. 지금 가장 기뻐해준 것도 려원 언니다. ‘너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 게 기분 좋고 너무 자랑스럽다’고 하더라. 너무 힘이 되고, 언니에게 나도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손담비에게 <동백꽃 필 무렵>과 향미는 어떻게 기억될까.
“<동백꽃 필 무렵>은 제 인생의 1막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되는 곳으로 기억될 것 같다. 지금까지 달려온 게 이걸 얻으려고 달려왔나 싶을 정도다. 대중분들에게 이런 사랑 한 번쯤 받아보고 싶다고 갈망을 해왔기 때문에, <동백꽃 필 무렵>을 기점으로 다른 필모그래피가 또 생기지 않을까. 가수할 때는 그 인기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어렸고, 너무 바빴다. 30대를 넘어가면서 여유를 찾았다. <동백꽃 필 무렵>을 통해 얻은 인기는 흡수하고 즐길 수 있게 된 것도 의미 있다. 향미는 안쓰럽고 불쌍하고 보듬어주고 싶은 사람. 아직도 향미를 다 보내지 못했다. 다음주 월요일에 실제로 코펜하겐에 화보촬영을 하러 가는데, 거기서 제대로 떠나보낼 생각이다.”
-앞으로 활동계획과 목표.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쉬고 싶지 않다. 늘 짝사랑하거나 철부지, 사랑받지 못한 캐릭터만 해와서 로맨스를 꼭 한 번 해보고 싶다. 다시 출발선에 선 기분이다. 가수 활동도 포기해본 적 없다. 연기로 더 인지도를 쌓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음반 활동을 쉬었지만, 언젠가 꼭 앨범을 낼 거란 생각은 있다. 엄정화 선배님처럼 되는 게 최종목표다. 가수와 배우를 넘나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