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으로

1차대전 식민지 용병들 ‘잊혀진 100년’

2014.07.18 20:49 입력 2014.07.18 20:53 수정

프랑스·독일·영국 등 유럽 열강들, 식민지서 군인들 대거 동원해 전 세계를 전쟁터로 만들어

인도인 14만여명 사상·아프리카인 최소 72만명 사망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한 1914년, 대서양 건너 영국 식민지였던 중미 카리브해의 바베이도스에서 나고 자란 조지 블랙맨은 17살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령 바베이도스 정부는 “모든 영국인은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독려했고 유럽으로 갈 군인을 모집했다. 카리브해의 젊은 남자들 사이에서는 제국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블랙맨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어렸던 블랙맨은 18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영국의 카리브해 연대에 합류해 유럽으로 가는 수송선에 몸을 실었다. 1만5000여명의 카리브해 출신 병사들이 블랙맨과 함께 참전했다. 그는 1919년까지 프랑스 전선에서 복무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는 전 세계 식민지 주민들이 동원됐다. 동아프리카 전선에서 통나무를 운반하는 독일 식민지 주민들. 영국제국전쟁박물관 자료

제1차 세계대전에는 전 세계 식민지 주민들이 동원됐다. 동아프리카 전선에서 통나무를 운반하는 독일 식민지 주민들. 영국제국전쟁박물관 자료

유럽에서 그는 난생처음 겪어보는 겨울 추위, 그리고 죽음의 공포와 싸웠다. 하지만 유럽의 군인들은 식민지에서 온 블랙맨과 동료들을 무시하고 차별했다. 백인 병사들은 흑인 병사들을 “깜둥이들(darkies)”이라 불렀다. 서인도제도 출신 병사들은 주로 참호를 파거나 전화선을 깔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등 더럽고 하찮은 일을 했다. 전투에 나가서 공을 세우는 것은 백인 병사들의 몫이었다.

영국, ‘자치권’ 사탕발림으로 참전 유도

영국의 일간 가디언은 얼마 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식민지 출신 병사가 남긴 시 한 편을 소개했다. “웃옷을 벗으니 가슴이 땀에 젖었네 / 한낮 잠시 멈춘 전쟁이 가져다 준 휴식 / 참호 깊은 곳으로부터 저 하늘을 향해 / 우리는 싸우지 않지만 결국은 죽겠지.” 지금 전 유럽은 1차대전이 발발한 지 100주년 되는 해를 기념하며 다시는 그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지만 식민지의 전사들은 잊혀졌다.

1차대전은 흔히 유럽의 전쟁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전 세계의 전쟁’이었다. 아프리카부터 중동,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 등 사실상 아메리카 대륙을 뺀 전 세계가 전쟁터였다. 거대한 식민지를 구축하고 있던 영국과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열강은 식민지 군인들을 유럽으로 데려와 전쟁을 치렀다.

영연방전쟁묘지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는 모두 110만5000명의 군인들이 동원됐다. 이 중 프랑스 일대의 서부전선에 13만8000명, 현재 이라크가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65만7000명,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14만4000명이 동원됐다. 일부는 터키 갈리폴리 전투와 동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되기도 했다. 인도 군대는 영국군의 전력 중 상당 부분을 담당했다.

특히 중동 지역에 투입된 영국군의 상당수는 인도인이었다. 1916년 4월 메소포타미아 쿠트 지방에서 오스만투르크에 붙잡힌 1만1600명의 영국군 포로 중 대다수는 인도인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인도는 전쟁 물자 수송을 담당하고 간호사들을 전선에 투입시키는 등 비군사적 영역에서도 큰 공헌을 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7만4000여명이 사망하고, 6만9000여명이 부상당했다. 워낙 막대한 병력을 파병했기 때문에 인도군의 공헌은 상당했다. 이를 인정받아 9200여명이 훈장을 받았다. 인도 뉴델리에는 1차대전 전몰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인디아 게이트’라는 추모비가 있다.

전쟁 초기 영국 햄프셔 지방에서 싸운 인도인 용병들. 영국제국전쟁박물관 자료

전쟁 초기 영국 햄프셔 지방에서 싸운 인도인 용병들. 영국제국전쟁박물관 자료

인도 군인들의 상당수는 자신들이 영연방에 소속돼 독일 등 동맹국에 맞서 싸운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영국에서 싸우던 한 인도군 부상병은 1915년 인도의 친척에게 보내는 편지에 “곧 영국과 프랑스, 벨기에와 러시아, 이탈리아, 인도와 캐나다가 독일을 공격할 거예요. 그러면 평화가 찾아올 거예요”라고 썼다.

이처럼 인도 군인들이 적극적이었던 것은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자국의 자치권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전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1차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이 끝나면 자치권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해 인도를 전쟁에 끌어들였다. 마하트마 간디조차 전쟁 초기에 인도 국민들의 적극적 참전을 독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은 전쟁이 끝난 뒤 약속을 뒤집었고 오히려 탄압의 강도를 높였다. 이는 전후 전개된 인도 독립 운동의 단초가 됐다.

다른 나라들도 영연방 소속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전쟁의 불똥은 태평양 한가운데까지 미쳤다. 연합군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참패한 갈리폴리 전투에서는 수만명의 호주와 뉴질랜드 출신 군인들이 숨졌다. 전쟁이 발발한 1914년 기준으로 뉴질랜드의 인구는 110만명에 불과했는데 이 중 13만여명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영국은 영연방 소속이 아닌 네팔의 용병부대 ‘구르카’ 20만명을 고용해 전선에 투입했다. 이 중 2만여명이 사망했다. BBC는 “영국과 프랑스는 심지어 13만5000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을 유럽의 전선으로 데려와 노동을 시키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프랑스와 독일 등 다른 열강도 아프리카의 자국 식민지에서 용병을 데려다 전쟁에 동원했다. 알제리 출신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아버지도 프랑스군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1914년 파리 부근에서 전사했다. 프랑스는 지난 14일 열린 1차대전 개전 100주년을 기념한 퍼레이드에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세네갈 등 과거 식민지 군인들을 초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BBC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독일은 아프리카 식민지 군대를 유럽 전투에 거의 동원하지 않았다. ‘백인이 아닌 사람들을 유럽의 전투에 투입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인종주의적 발상 때문이었다.

[역사 속으로]1차대전 식민지 용병들 ‘잊혀진 100년’

유럽의 전쟁에 전 세계가 짓밟힌 셈

1차대전은 유럽에서만 벌어졌다고 흔히 생각한다. 전쟁을 일으킨 것도 유럽 열강이었고 전쟁의 결과를 좌우한 것은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들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 세계 곳곳이 전쟁터였다. 아프리카 대부분이 전장이었고, 시나이 반도와 메소포타미아·아라비아 지역 등 중동의 거의 전역에서도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다. 독일의 조차지(租借地)였던 중국의 산둥(山東) 반도와 남태평양에서도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특히 아프리카 대륙은 1차대전의 주요 전장이었다. 당시 아프리카는 영국, 프랑스, 독일, 포르투갈, 벨기에 등 열강의 식민지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독립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나라는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 둘뿐이었을 정도다. 아프리카 곳곳에서는 자국의 식민지를 만들려는 열강의 각축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선전포고를 하자마자 독일령인 토고와 카메룬을 침공했고 독일은 곧바로 영국령이었던 남아공을 공격했다. 그 외에 현재 탄자니아의 일부인 탕가니카 지방 등 독일령 동아프리카 지방을 중심으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1차대전은 유럽 열강의 필요에 의해 벌어진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아프리카 대륙 곳곳을 유린했다. 심지어 현지인들이 자기 땅을 짓밟는 전쟁에 대거 동원됐다. 200만여명의 아프리카인이 노동자나 군인으로 1차대전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터키 갈리폴리의 뉴질랜드군 소속 마오리족 전사.   영국제국전쟁박물관 자료

터키 갈리폴리의 뉴질랜드군 소속 마오리족 전사. 영국제국전쟁박물관 자료

아프리카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러시아 기자 바딤 에릭맨이 2004년 발표한 ‘20세기 인구손실 보고서’에 따르면, 아프리카 대륙 사람들 중 최소 72만명이 1차대전 당시 숨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1차대전 사망자가 약 1000만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상당한 숫자다. 보고서는 벨기에의 식민지였으며 독일의 공격을 받았던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15만5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밝히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이지리아에서는 8만5000명이 사망했다. 독일 식민지였던 탄자니아에서는 5만명이 숨졌다. 전쟁 후 독일의 식민지였던 르완다와 탄자니아, 카메룬 등의 지역은 분할돼 연합국에 분배됐다.

군대만 전쟁에 동원된 것이 아니었다. 영국 제국전쟁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전쟁 내내 아프리카 전역은 유럽 열강들의 거대한 식량과 천연자원 생산 기지의 역할을 했다. 군인들에게 음식을 나르기 위해서 여자와 어린아이들도 동원돼 끌려다녔다.

남태평양 일대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뉴질랜드와 일본, 미국 등은 전쟁 초기 독일 식민지였던 남태평양의 섬 서사모아와 뉴기니 섬을 점령했다. 전쟁의 여파는 중국에까지 미쳤다. 연합군 측에 가담해 참전했던 일본은 영국과 함께 칭다오(靑島)를 공격했다. 일본은 중국이 1922년 칭다오를 수복할 때까지 이 지역을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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