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앙스 다른 조서라도 시키는 대로 손도장… 그대로 판결문으로”

2015.01.09 22:29 입력 2015.01.09 22:43 수정
이범준 기자

‘검찰 권력 피해자’ 장진수 전 주무관

▲ “빨리 실토 안 하면 평생 후회… 담당 검사 첫마디에 기분 오싹
피고인 일방적 불리한 형사절차, 과연 진실 밝혀낼까 의심스러워”

“검찰 조서를 작성하고 보니 어떤 나쁜 놈이 비열하게 혐의를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그려져 있더군요. 나쁜 짓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는데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검찰에서 12시간을 조사받으면서 뉘앙스가 다르다고 일일이 고칠 힘이 없었습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손도장을 찍고 만 거죠. 그게 그대로 판결문이 됐습니다.”

2012년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의 윗선 개입을 폭로해 2차 수사를 이끌어낸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42)은 “민간인 사찰과 정권의 은폐는 말할 것도 없고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더 절망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2010년 1차 수사에서 증거인멸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대법원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됐다.

2012년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의 윗선 개입을 폭로했던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은 6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으면서 사법정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 이준헌 기자

2012년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의 윗선 개입을 폭로했던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은 6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으면서 사법정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 이준헌 기자

장 전 주무관이 검찰에 불려간 것은 2010년 8월19일이다. 총리실에서 이미 수사에 대비해 윗선을 보호하라고 훈련을 받았지만 막상 사무실에서 수사관들을 맞닥뜨리니 겁이 났다. 이미 부인에게서 집에 수사관이 들이닥쳐 압수를 시작했다고 전화를 받은 터였다. 수사관들은 압수수색영장을 보여주며 화장실로 데려가 소지품을 뒤지더니 다짜고짜 검찰청으로 가자고 했다.

“검사가 부른다니 그냥 잡혀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총리실에 파견 근무 중인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평소에도 친하게 지내던 사이라 의논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파견 검사는 ‘법률상은 임의동행이라 안 가도 되지만 현실적으로 가는 게 좋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장 전 주무관은 마음을 고쳐먹고 대신 수사관들에게 ‘압수·수색된 집도 좀 정리하고 내일 반드시 가겠다’며 사정을 얘기했다. 수사관들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서울중앙지검 담당검사에게 얘기를 하라고 했다. 전화 건너편에서 ‘오늘 안 들어와서 장진수씨한테 좋을 것 하나도 없으니 들어오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날 검찰청에 가자마자 ‘검사 말을 들을 걸’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검사실에 들어서자마자 ‘당신한테 세 번의 기회를 주겠다. 빨리 실토를 해야 조금이라도 선처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이다. 인생은 끝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도무지 검사 말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싹한 기분이 들었지만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날부터 하루 12시간씩 조사를 받았다. 첫날은 훈계만 듣다가 하루가 끝났다. 그리고 두 번째 조사부터 본격적인 신문이 시작됐다.

“나이, 학력, 재산 같은 것을 오전 내내 묻습니다. 변호사가 처음부터 대답을 거부하면 안 좋은 인상을 주니 답하라고 했습니다.”

장 전 주무관은 변호사 조언대로 고분고분 신문에 응했다. 어느새 물으면 답하는 자동응답기계로 훈련이 돼 가고 있었다.

“12~13시간을 조사받고 나면 문답식으로 적힌 조서를 줍니다.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냐. 납득시킬 수 있을 게 설명해봐라’ 이런 식입니다. 대답을 안 하면 ‘먼 산을 보며 묵묵부답’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창문도 닫혀 있어 산이 보이지도 않는데 그런 식입니다. 두 줄을 긋고 도장을 찍고 고쳐야 하는데 그러면 전체 문장이 안 만들어집니다. 결국 읽다가 포기하게 됩니다.”

장 전 주무관 입장에서는 대답은 자신이 하는 것이고 자판도 칠 줄 아는데 왜 검사가 자기 마음대로 적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니터만 하나 더 설치하면 작성 내용을 바로 보면서 고쳐 달라고라도 할 텐데 왜 13시간 뒤에 확인하라는 것인지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나흘째 되자 검사가 ‘이제 당신은 기회를 다 썼다’면서 폐쇄회로(CC)TV 촬영화면을 증거라며 내놓았다.

“수사를 받는 내내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변호사에게는 ‘뒤에 앉아서 지켜보기만 하라’며 일일이 조언하면 내보낸다고 윽박질렀습니다. 한 번은 변호사 쪽을 향해 돌아보며 ‘이거 답해야 하냐’고 물으니 검사가 곧바로 제지했습니다. 그사이에 수사관들이 ‘대답 똑바로 해’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겁을 주더군요. 공포와 수치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검사는 마지막 조사가 끝나자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검사는 영장실질심사에서 ‘죄를 지은데다 도주의 우려가 있고, 묵비권까지 행사하므로 구속을 해야 한다’고 했다.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묵비권은 헌법이 보장한 권리인데, 내가 대답을 하나도 안 한 것도 아니고, 한두 가지 안 한 게 구속 사유라뇨.”

장 전 주무관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됐다. 하지만 불구속 상태에서 진행된 재판은 시간이 갈수록 장 전 주무관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됐다.

“내가 손도장을 모두 찍기는 했지만 그 수많은 조서 가운데 어느 부분이 제출된 것인지 목록만 봐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제 와서 일일이 확인하기도 어렵고, 설령 조서가 내 말과 다르다고 해도 판사가 믿어줄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연이은 12시간 조사에 지쳐 인정하고 만 조서가 법정의 증거가 됐습니다.”

장 전 주무관은 유죄판결 자체보다 피고인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형사절차에 더 큰 좌절감을 느꼈다고 했다.

“형사재판은 무죄추정 원칙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판결문에는 검사의 주장이 이렇기 때문에 유죄이고 나의 무죄 주장은 안 믿는다고 써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게 항소심과 상고심까지 이어졌습니다. 평생 처음 검찰 수사를 받으며 이런 형사절차로 과연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지, 사람을 벌해도 되는지 의심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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