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동 빗물 펌프장 참사 유족 “가족 파탄에 아직도 눈물…김용균법에도 ‘위험한 현장’ 바뀌지 않아”

2020.01.02 21:42 입력 2020.01.03 19:49 수정

서울 양천구 목동 빗물펌프장 사고로 사망한 현대건설 직원의 아버지 안종수씨가 지난해 12월19일 충남 홍성의 농가에서 유기견들을 돌보고 있다. 안씨는 얼굴 사진을 촬영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서울 양천구 목동 빗물펌프장 사고로 사망한 현대건설 직원의 아버지 안종수씨가 지난해 12월19일 충남 홍성의 농가에서 유기견들을 돌보고 있다. 안씨는 얼굴 사진을 촬영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지자체 상대 손배소송한 까닭은 돈 문제로 비칠까봐 걱정하지만
검찰 기소 않고 수사기록도 못 봐 ‘원인·책임 소재’ 따지고 싶어

정직원 기피 현장엔 협력사 투입 관행 목격…지자체는 책임 회피
정부, 일자리 마련만 신경 쓸 뿐 ‘안전 불감’ 산업 현장 몰라 답답
유족이 ‘해달라’ 나서기 전에 국가가 먼저 ‘의사자’ 지정해야 마땅

회색 털모자 아래 미간에는 주름이 깊게 파였다. 인터뷰 내내 펴지지 않았다. 서울 양천구 목동 빗물펌프장에서 산업재해로 아들을 잃은 안종수씨(59)의 얼굴이 그랬다. 사고 이후 겪어온 질곡과 슬픔, 분노 등 갖은 감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안씨 아들은 빗물펌프장 시공사인 현대건설 직원이었다. 사고가 난 지난해 7월31일에는 많은 비가 쏟아졌다. 빗물이 차서 수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배수터널에서 작업을 하던 하청업체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는 이를 알지 못했다. 안씨 아들이 직접 이들을 구하러 배수터널로 들어갔을 때 빗물 6만t이 순식간에 쏟아졌다. 빗물은 노동자들을 단숨에 삼켜버렸다. 그로부터 반년이 흘렀다.

사고 이후 국가는 유족들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안씨는 사고의 진실을 홀로 찾아 헤맸다. 어디서부터 잘못됐고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알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경찰 수사 내용도 볼 수 없었다. 언론 보도가 맞출 수 있는 퍼즐 조각의 전부였다. 그가 메고 온 등산배낭 안에는 사고 관련 종이뭉치가 가득 있었다.

안씨는 다른 유족들과 함께 지난해 12월16일 서울시와 양천구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경향신문 2019년 12월18일자 12면 보도). 그날의 진실을 재판을 통해 명확히 알고 싶었다. 국가에 아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고 싶었다. 지난해 12월4일 서울 성동구의 한 카페에서 안씨를 만났다.

- 사고 이후 어떻게 지냈나.

“저도 처도 사람들을 만난 지 한 달밖에 안됐다. 저보다 처가 많이 힘들어했다. 홍성에서 농사를 짓고 잡념을 잊고 지냈다. 조그맣게 집을 짓고 개 네 마리와 살고 있다. 개 쉼터를 만들려고 한다.”

- 사건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있다.

“사고 당사자가 되니까 부모들이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가족이 파탄나는 거다. 정신적으로도 평생 간다. 제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며느리도 ‘멘붕’(정신이 무너지는 상태)이 왔다. 그전엔 뉴스를 통해 봤지만 제가 당하니까 ‘정말 이건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지자체를 상대로 손배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돈 문제로 비칠까봐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빨리 수사기록을 받으려면 소송을 해야 한다. 검찰은 기소도 안 했다. 사건과 관련해 받아볼 수 있는 게 없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방정부가 뭘 감추려 했는지, 뭐가 감춰졌는지 잘못된 부분들을 재판에서 조목조목 따져야 한다. 조사 과정을 보면 공무원들은 자기들이 살려고 발뺌하고 부인했다.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 사고 이후 서울시와 양천구는 어떤 조치를 취했나.

“장례식장에 온 것밖에 없다.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하겠다고만 했다. 책임지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서울시는 초반부터 현대건설이 운영주체였다고 했다가 나중에 한발 물러났다. 서울시가 처음부터 그런 모습을 안 보였으면 좋았을 거다. 서울시 측이 브리핑할 때 당당해서 깜짝 놀랐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니 이런 사고가 계속 일어난다. 항상 미봉책으로 그치고 반복되는 게 가슴 아프다. 어떤 사고가 나든 관할 부서나 책임자들이 (책임을 지는) 떳떳함을 보였으면 좋겠다. 우리나라는 정부가 그런 역할을 못한다. 무엇이든 시공사나 노동자들의 실수, 부주의로 사고가 일어났다고 한다.”

- 서울시와 양천구가 아들을 의사자로 지정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처음에는 의사자라는 말이 굉장히 싫었다. 아들이 한 일은 누구라도 했을 일인데…. 그 죽음을 놓고 흥정하는 것 같았다. 지금은 아들이 의사자로 지정되길 바란다. 손주가 4개월 뒤 태어난다. 아빠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의 죽음이 명예로웠으면 한다. 서울시 측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7월31일 구조대원들이 서울 양천구 목동 빗물펌프장에 고립된 노동자들을 구하기 위해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지난해 7월31일 구조대원들이 서울 양천구 목동 빗물펌프장에 고립된 노동자들을 구하기 위해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 사고의 책임과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두 수문은 통상 빗물이 70% 찼을 때 열려야 하는데 50~60%일 때 자동으로 열렸다. 당시 호우주의보였고 노동자들이 안에서 일하고 있었다. 일기예보에도 애초에 자동으로 개폐되도록 맞춰놓은 게 문제다. 노동자들이 일을 못하게 했어야 한다. 담당 직원도 지키고 있어야 했다. 또 열렸으면 닫아야 하는데 닫을 수 있는 수단이 공유되지 않았다. 빗물이 펌프장에 차는 시간도 시운전 때는 49분이었다고 한다. 아들은 이를 알고 노동자들을 구하러 간 거다. 그런데 실제로는 훨씬 더 빨리 빗물이 들이닥쳤다. 1차적 책임은 양천구에 있다고 본다.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했다.”

- 사망자 3명은 공교롭게도 한국인 정규직, 한국인 비정규직, 외국인 비정규직이었다. 고용형태에 따라 죽음이 다르게 처리됐다.

“보상에도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가장 가슴 아픈 게 외국인 노동자다. 아무도 신경을 안 써 방치됐다. 미얀마대사관을 찾아가 대사에게 면담을 신청하고 항의했다. ‘너희 국민이 죽었는데 너희 대사는 국민들 보살피는 역할을 이 정도밖에 못하냐. 시신 옮기는 역할밖에 못하냐’고 했다.”

안씨의 요구에 양천구는 사망한 미얀마 출신 노동자 쇠 린 마웅의 분향소를 마련했다. 공공기관이 나서서 외국인 노동자 분향소를 마련한 것은 처음이다. 마웅의 이야기를 하자 안씨의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외국인 노동자 단체들이 분향소에 많이 오지 못했다. 분향소를 내내 지켰던 건 제 후배들이다. 지킬 사람이 없으니까. 후배들이 손님 받고 얘기하고 그랬다.”

- 현대건설 정직원이 현장에서 사망한 게 처음이라고 한다.

“듣고 놀랐다. 자기들은 한번도 위험한 데 들어가본 적이 없는 거다. 협력업체 직원들만 시켰다. 현대건설 직원들이 아들 장례식장에 왔을 때 욕했다. 너희들이 죽인 거라고 했다. 한번도 이런 사건이 없었기 때문에 회사장을 치러달라고 했다. 사장이 받아들였다. 현대건설 입장에서는 아들의 죽음으로 자기들이 산 거다. 아들이 안 들어갔으면 모든 책임은 우리 아들이 졌을 거다. 우리 아들은 회사를 못 다녔을 거다. 부끄러움 때문에.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 아들에게 평소 노동문제를 이야기하곤 했나.

“아들에게 소수자를 대변하고 그들 편에 서야 한다고 얘기를 많이 했다. 아들이 어렸을 때 집회 현장에도 많이 데려갔다. 공사 현장에서 직원들은 하청 직원들을 관리한다. 말 한마디로 싸우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아들에게 하청 직원들에게 말 한마디라도 조심하라고 했다. 하청 직원들이 아들 장례식장에 많이 왔다. 그분들하고 이야기했는데, 아들이 현장 내려가서 자기들을 이해해주니까 많이 풀렸다고 했다.”

- 평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나.

“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일한 적 있다. 미얀마와는 인연이 깊다. 옛날에 ‘소승불교를 좋아하는 사람들’ 카페지기를 했다. 미얀마 노동자들은 불교 신자들이다. 추석 같은 때 이들이 갈 데가 없으니까 함께 절 순례를 하고 다녔다. 1980년대 노동자 대파업 이후 노동운동도 했다. 당시 이한열부터 얼마나 많이 죽었나. 그때 거리에서 살았다. 지금도 소수자, 억압받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싸워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항상 이런 부분이 부족하다. 노동단체에서 일하다 서로 도우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관심을 가졌다. 상호부조 생명존중에 대한 것들이다. 지금 자연농(무경운, 무농약, 무비닐로 하는 농업)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한다.”

- 평소 생각이 이번 사건 대응에 영향을 미쳤나.

“그렇지 않다. 당사자가 되니 심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백지상태가 됐다. 아들 죽음이 닥치고 가족은 완전히 무너져 갔다. 수습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주위 가족들이 다독여줘서 정신 차린 거다. 당해보지 않으면….”

- ‘김용균법’(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생긴 뒤 산업 현장이 안전해졌나.

“아니다. 위험한 현장은 하청 직원들이 한다. 하청 직원들이 또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하청을 준다. 우리의 속살이다. 앞으로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계속 죽을 거라고 본다. 정말로 헐값, 똥값에 고생하다가 귀한 아들이자 젊은 친구들이 와서 죽는다. 국가는 이를 모른다. 일거리를 준다고 큰소리친다. 외국은 굉장히 고마워하고 흥정한다.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시스템 안에 다 있다고 생각한다.”

- 산업재해 유족들이 목소리를 많이 내고 있다.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김용균씨 어머니를 보면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제 처나 며느리는 사건 관련해 보는 걸 두려워한다. 자꾸 상기되니까. 관련된 사람도 안 만나려고 한다.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나도 똑같다. 그래도 견뎌내고 있다. 24시간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고 미친 사람처럼 되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사고를 당한 가족들이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더 만나고 연대해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부분도 있다. 그런 역할을 세월호 유가족들이 해줬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이들을 위해 해줄 역할은 ‘보상’이 아니라 ‘배상’이다. 보상을 받으려고 죽은 게 아니다. 국가가 책임질 수 있는 배상을 해야 한다. 국가는 노력한 사람들을 의사자로 지정해야 한다. 가족들이 찾아다니면서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당연히 먼저 해줘야 한다.”

- 곧 손주가 태어난다.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걸 장례식 때 알았다. 드라마 같은 상황이었다. 며느리가 결심해서 자기가 키우겠다, 낳겠다고 얘기했을 때 엄청 고마웠다. 혼자 살아가는 데 얼마나 힘들겠나. 결혼한 지 11개월 만에 이런 사고가 났다. 아들과 10년 연애를 했다. 부모는 다 똑같을 거다. 자식이 없는 상태에선 무서운 것도 없고, 낙도 없다. 기대할 수 있는 게 앞으로 태어날 손주밖에 없다. 손주가 태어나면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아들이 의사자로 지정돼 손주가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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