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무심코 비튼 ‘수어’…농인에겐 또다른 차별

2020.08.26 19:02 입력 2020.08.26 23:21 수정

TV속 희화화·왜곡도 많아…“국어와 동격, 웃음거리 아냐”

지난 13일 서울 동작구 흑석역 인근에서 중앙대 의과대 학생들이 연 시위에 ‘덕분에 챌린지’를 비꼰 손팻말이 등장했다. 연합뉴스

지난 13일 서울 동작구 흑석역 인근에서 중앙대 의과대 학생들이 연 시위에 ‘덕분에 챌린지’를 비꼰 손팻말이 등장했다. 연합뉴스

오른손 엄지를 치켜든다. 왼손바닥 위에 받친다. 이 손동작은 한국 수어로 ‘존경하다’라는 뜻이다.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헌신하는 의료진을 응원하는 캠페인 ‘덕분에 챌린지’로 잘 알려져 있다. 지난 6일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의대협)가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방안에 반대하며 이 손동작을 비틀었다. 오른손바닥 아래 왼손 엄지가 아래로 향하게 했다. 포스터 이미지는 ‘덕분이라며 챌린지’ 해시태그를 타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퍼졌다.

‘세상을 바꾸는 농인들’(세바농) 활동가인 30대 여성 김모·이모씨와 20대 여성 박모씨는 지인이 공유한 의대협 이미지를 보고 놀랐다. 농인의 언어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들은 SNS를 활용한 인터뷰에서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로도 충분히 입장을 전달할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수어를 비틀어 사용해야 했을까’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경기도농아인협회 미디어지원접근센터에서 일하는 이샛별씨(31)도 불쾌했다. 이씨는 e메일 인터뷰에서 “청각장애가 없는 청인들이 수어를 악용하거나 패러디로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의대협이 해당 손모양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사과하며 논란은 일단락됐지만, 농인들의 문제의식은 유효하다. 인터뷰한 4명의 농인들은 “한국 수어는 한국어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농인의 고유한 언어이니 존중했으면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 수어가 청인에 의해 왜곡되거나 희화화 대상으로 쓰인 경우는 수차례 있었다. ‘산(山)’을 표현하는 수어라며 가운뎃손가락만을 치켜드는 게 대표적이다. 2012년 종영된 KBS 예능 프로그램 <스펀지>에 소개된 후 해당 방송 장면은 인터넷에서 비속어를 쓰는 용도로 사용됐다. 세바농 활동가들은 “중지만을 드는 손모양은 산을 뜻하는 한국 수어가 아니라 비속어일 뿐”이라고 했다. 2010년 SBS 드라마 <나쁜 남자>에서 남자 주인공이 수어로 이야기하는 장면도 일명 ‘고인돌 짤방’으로 유행했다. 해당 수어는 ‘당신이 이곳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라는 뜻이지만, 누리꾼들은 손동작과 모양으로만 비틀어 해석해 상대를 협박할 때 해당 장면을 가져다 썼다.

세바농 활동가들은 “수어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퍼지면 어느 사이에 ‘사실’로 굳어져 버린다”며 “농인들은 불쾌할 뿐 아니라 모국어인 수어가 청인(聽人)들에 의해 훼손될까 우려한다”고 말했다.

한국 수어는 한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갖는다. 2016년 제정된 한국수화언어법은 “한국수화언어는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고유한 언어임을 밝히고, 농인과 한국수화언어 사용자의 언어권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한다. 그럼에도 청인 중심 사회에선 여전히 한국 수어를 ‘이등언어’나 ‘수준이 낮은 언어’로 취급한다. 활동가들은 “언어적 소수자로서 여전히 수어가 하나의 언어로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수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차별을 겪기도 한다. 세바농 활동가들은 “많은 농인들이 면접에서 ‘광탈’한다”며 “청인·음성언어 중심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독순술(상대의 입술 모양을 읽어 음성언어 내용을 유추하는 기술)과 음성언어로 말하는 방법을 익히는 농인들이 많다”고 했다. 이샛별씨는 2018년 수어통역사 없이 간호사와 스마트폰 메모장에 문자를 써 가며 아이를 낳아야 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 두 눈이 저절로 감기는데도 ‘메모장을 봐야 한다’는 강박감이 자꾸 들었다.

코로나19가 번지고 난 뒤 매일 진행하는 정부 브리핑에 수어통역사가 등장했다. 화면 오른쪽 아래 동그라미 속이 아니라 브리핑 담당자 옆에 나란히 나온다. 활동가들은 “그제야 농인의 존재를 알게 된 청인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며 “어디든 농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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