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돈 걱정 없이 공부할 권리가 먼저!

2021.02.26 16:16 입력 2021.02.26 23:22 수정
나승위

나승위의 ‘라곰 배우기’

정호승 시인은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라고 노래했다. 나이가 들면서 꿈이 현실감으로 짠 옷을 입게 되면, 내 그물에 걸리는 것은 고래가 아니라 고등어라는 서글픈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청년들이여, 청년일 때 마음속에 고래 한 마리씩 키워 보자. 고래를 키우는 것은 청년의 ‘특권’이다.

스웨덴 대학생들의 든든한 언덕이 되어주는 ‘학자금지원청’ CSN 건물. CSN은 1964년에 설립된 스웨덴 교육연구부 산하 정부기관이다.

스웨덴 대학생들의 든든한 언덕이 되어주는 ‘학자금지원청’ CSN 건물. CSN은 1964년에 설립된 스웨덴 교육연구부 산하 정부기관이다.

그러나 청년들이 고래를 키우기 위해선 도움이 필요하다. 고래를 키우려면 비용이 드는데, 청년들은 대부분 가난하기 때문이다. 큰아이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는 스웨덴 청년들이 어떤 식의 도움을 받으며 고래를 키우는지 알게 되었다.

“엄마, 나 500크로나(약 6만5000원)만 줘. 뭐 좀 살 게 있어서….” 큰애의 말에 나는 바로 송금해 주면서 물었다. “뭘 살 건데?” “휴대폰 케이스 사고, 친구도 만나기로 했고… 이번에 기숙사비를 내서 돈이 없어.” 며칠 뒤 나는 큰애에게 물어보았다. “돈 더 필요하지 않니?” “아니, CSN에서 돈 들어왔어.” 작년 가을, 큰아이가 대학생이 된 이후 돈 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영국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영국에 간 지 3주 만에 집에 돌아와서 온라인수업으로 한 학기를 마쳤다. 스웨덴 아이들은 대학에만 들어가면 부모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한다더니, 정말 그랬다. CSN은 1964년에 설립된 ‘학자금지원청’으로 스웨덴 교육연구부 산하 정부기관이다.

아이를 셋이나 키우는 내게 ‘평등’에 입각한 스웨덴의 공교육정책은 무척 감동스럽다. 학교에서 점심식사는 말할 것도 없고, 노트와 연필 등 학습도구도 무상 제공된다. 나보다 더 좋은 학습도구를 사용하는 친구가 없고, 준비물을 가져오지 못해 쩔쩔매는 친구도 없다. 적어도 학교수업을 받는 면에 있어서는 무척 평등하다. 일례로 놀랍게도, 초·중·고생들에게 노트북이 일괄 지급된다. 수업을 하거나 과제를 할 때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혹시라도 집에 컴퓨터가 없거나 성능이 나쁘면 학생의 학업수행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스웨덴 사회의 중요 가치 ‘평등’
평등이 가장 빛 발하는 곳 ‘학교’

가난이 ‘꿈’에 방해 되지 않게
노트북 등 학습도구 일괄 지급

대학생엔 월 145만원 보조금
기후변화 등 고민할 여력 지원

스웨덴 사회를 지탱하는 주요 가치 중 하나인 ‘평등’이 가장 빛을 발하는 곳이, 나는 학교라고 생각한다. 배움의 장소인 ‘학교’는 어린 사람들이 미래를 살아갈 힘을 기르는 곳이다. 따라서 학교에서는 절대적인 평등이 실현되어야 하고, 어린 학생들은 배움에 있어 빈부의 격차를 결코 느낄 수 없어야 한다.

어렸을 때 집안형편이 어려웠다는 제시카(45)란 친구가 있는데, 그녀가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제시카의 엄마는 샌드위치에 치즈와 햄을 함께 넣어 먹는 게 아니라고 말해서 항상 둘 중에 하나만 넣어 먹었는데, 어느 날 반 친구 집에 놀러 갔더니 그 친구는 샌드위치에 치즈와 햄, 게다가 삶은 달걀까지 함께 넣어 먹더라는 것이다. 깜짝 놀란 제시카가 엄마가 말한 대로 “샌드위치에는 뭐든 한 개만 넣어 먹는 거”라고 알려주었더니, 친구가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단다. 제시카는 그때까지 자신의 집이 가난한 줄 몰랐다고 했다. 학교에선 모두가 똑같았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형편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가난해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부자 친구와 똑같이 학교 다니면서 공부할 수 있었으니까.

말뫼시 부시장인 프리다 트롤뮈르(42)는 한국에서 아들 둘을 입양해 키우고 있다. 프리다 역시 형편이 어려운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고, 학자금지원청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대학을 가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다. 그녀는 대학을 마칠 때까지 55만크로나(약 7500만원) 정도를 대출받았고, 현재 매월 15만원가량씩 갚아 나가고 있다. 지금은 1000만원 정도 대출금이 남아 있다. 가정형편에 상관없이 꿈을 키우며 대학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선 25년 전의 제시카나 23년 전의 프리다, 현재 18세인 우리 아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학자금지원청의 도움을 받고 있는 학생은 51만명 정도라고 한다. 대학생이 되면, 학자금지원청으로부터 4주에 한번 학생보조금 3312크로나(약 45만원)와 학자금 대출 7616크로나(약 100만원), 도합 1만928크로나를 받을 수 있다. 학생보조금은 거저 주는 돈이고, 대출금은 학교 졸업 후 6개월 이후부터 최장 25년 동안 0.05% 이자율로 갚아야 한다. 대출금을 갚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60세가 될 때까진 완납해야 한다. 1만928크로나는 약 145만원인데, 이 정도면 스웨덴 대학은 학비가 없으므로, 부모 도움 없이 살 수 있다. 만약 학생에게 부양해야 할 자녀가 있다면 자녀양육수당을 추가로 더 받을 수 있고, 기타 다른 요건이 있다면 수당이나 대출금을 더 받을 수 있다. 사실 학자금대출은 이자가 거의 없는 수준이라 대출반환금 부담도 크지 않다.

그렇다고 나중에 갚아야 할 대출받는 돈을 편하게 생각하는 대학생은 없다. 프리다의 경우, 여름방학 때 잠깐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기 중에는 공부만 했기 때문에 갚아야 할 대출금이 많은 편이지만, 많은 대학생들은 최대한 대출을 적게 받으려고 학기 중에도 아르바이트를 한다. 내 친구 구닐라의 딸 아니는 말 돌보기, 수영장 청소, 카페나 옷가게에서 점원으로 파트타임 일을 했다. 이런 아르바이트 일자리는 수월하게 구할 수 있는데, 요즘엔 요가 스튜디오 청소를 해주고 요가를 공짜로 배운다고 한다. 학자금대출을 최대한 받으려면, 6개월간 아르바이트 수입이 6만4531크로나(약 850만원)를 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올해 상반기까지 한시적으로 아르바이트 수입 한계선을 없앴다.

프리다가 대학시절 같은 학생기숙사에서 살았던 한 남학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집안형편이 어려운데도 학생보조금만 받고 대출은 받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도 별로 하지 않고 오로지 공부만 하면서 학생보조금에서 기숙사비를 뺀 500크로나(약 6만5000원)를 한 달 식비로 쓰며 정말 궁핍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 친구는 현재 주정부 고위공직자이다.

물론 집안이 부유한 학생은 대출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주변에서 부분적으로나마 학자금지원청의 대출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사람은 못 봤다. 실제로 형편이 어렵기도 했겠지만,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은 마음도 크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아이가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말뫼대학교에 들어갔어도 집을 떠나려고 했을 것이다. 학교까지 30분 걸리는 곳에 방을 구해서! 제시카가 집을 떠난 나이는 18세, 프리다가 집을 떠난 나이는 19세였는데, 그때부터 그들은 부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전혀 받지 않았다. 엄마는 큰 아파트에서 혼자 사는데, 딸은 엄마가 사는 아파트 몇 블록 건너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룸메이트와 사는 게 스웨덴에서는 흔하고도 당연한 일이다.

공부를 하기 위해 가뿐하게 가방을 싼 뒤 부모 집을 떠나는 청년의 상쾌한 기분이라니! 만약 여기에 돈 문제가 얽힌다면, 가뿐하게 가방을 쌀 수 없고 상쾌한 기분으로 부모 집을 떠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부모 집을 떠나는 청년들은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씩 키우고 있지 않을까? 스웨덴은 이 모든 것을 국가가 해준다. 그래서인지 스웨덴 국민들은 세금 많이 내는 것에 반감이 없다.

그렇다고 스웨덴의 경제상황이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다. 특히 1970년대에 여러 가지 정책이 실패하면서 정치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규모를 줄이지 않았다는 것이 참 놀랍다. 예란 페르손 전 총리는 스웨덴 복지제도를 범블비에 비유했다. 무거운 몸집에 작은 날개를 지닌 범블비. 그 날개로는 도저히 날 수 없을 것 같은데, 잘 날아다니는 범블비.

집을 떠나 활기찬 대학생활을 하고 있어야 할 아이가 코로나19 때문에 집에서 온라인수업을 받고 있으니 안타깝다. 그런데 집에 있으니 생활비가 들지 않아 미리 신청해 둔 학자금대출금이 좀 남는 모양이다. 이틀 전, 아이가 내 의견을 물었다. “친구들이 함께 여행 가자는데, 갈까?” 역병이 도는 이 시국에 결코 맘에 들지 않는 계획이지만,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말할 수 없었다. 여비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까. 며칠 전 내게 500크로나를 달라고 했을 땐 그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물을 수 있었지만, 학자금대출로 받은 돈은 어디에 쓸 것인지 묻지 않게 된다. “이런 시국에 여행 가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니 잘 생각해 봐.” 겉으로는 온화하게 이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네가 지금 정신이 있냐 없냐?’는 말이 수차례 오고 갔다. 다행히 여행계획은 곧 취소됐지만 마음 한구석은 서늘했다. 이제 정말 아이의 결정에 크게 간섭할 수가 없구나. 그러나 또 한편으론 마음이 가벼웠다.

그런데 학자금대출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간섭하는 곳이 있으니, 바로 돈을 주는 국가기관이다. 한 달 생활비예산도표를 제시하고, 가장 중요한 집세는 자동이체해 놓으라고 충고한다. 때로 외식하고 싶고 친구들과 여행도 가고 콘서트에도 가고 싶을 텐데, 이런 데 먼저 돈을 쓰고 집세를 제때 못 낼 경우 집에서 쫓겨날 수 있고 신용에도 문제가 생겨 다음 집을 구하기 어려워진다고 경고도 한다.

이렇게 국가의 탄탄한 지원을 받는 스웨덴 젊은이들은 부모의 재력과 상관없이 생활에 대한 염려를 크게 하지 않는다. 그래도 어찌 고민이 없을까? 한국에선 심지어 “아프니까 청춘”이라는데. 나는 아니에게 혹시 개인적인 걱정거리가 있느냐고 슬쩍 물어보았다. 아니는 아르바이트로 유치원 보조교사 일을 할 만큼 아이들을 좋아한다. 결혼하면 아이들을 다섯 명쯤 낳고 싶은데, 아이 낳기가 망설여질 만큼 큰 걱정거리가 있다고 했다. 바로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이다. 아니는 현재 생존 인류는 손자녀 세대를 보지 못할 거라는 말도 들었다며 우울해했다. “그러니까, 네 가장 큰 고민거리는 기후변화란 말이구나!” 아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환경운동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변화와 관련하여,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맞짱’을 뜬 바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환경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가 스웨덴 소녀라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얼마 전, 내 가게에 비빔밥을 사러 와 알게 된 룬드대학교 지속가능성과학부 교수인 저명한 기후학자 킴벌리 니콜라스 박사는 스웨덴 젊은이들은 코로나19보다 기후변화를 훨씬 더 염려하며, 다양하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럽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지구상에는 기후변화나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기에 앞서, 먹고사는 걱정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에 처해 꿈을 포기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면, 그들이 보다 나은 미래를 살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든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든 어떤 방법으로든 실제적인 도움을 주어야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면서, 누구나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고, 모든 일은 다 자기 하기 나름이라고 충고하는 건 가혹한 일이다.

젊은이들은 고생을 할 게 아니라 공부를 해야 하고, 생활의 염려에서 벗어나서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를 키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있도록 국가가 ‘평등’의 원칙에 입각해서 도와야 한다. 그래야 젊은이들이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거시적인 안목도 갖게 될 것이다.

범블비 덕분에 스웨덴 청년들은 몸집 큰 고래를 키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삶]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돈 걱정 없이 공부할 권리가 먼저!


▶나승위

갑자기 스웨덴에서 일자리를 찾은 남편을 따라 아들 셋을 데리고 남부 도시 말뫼에 왔다. 처음엔 아무 연고 없는 곳에서 뭘 하며 사나 했는데, 지금은 제법 바쁜 사람으로 통한다. 스웨덴을 한국에 소개하는 책 <스웨덴, 삐삐와 닐스의 나라를 걷다>와 <스웨덴 일기>를 썼고, 스웨덴 사람들에게 한국의 맛을 소개하고자 비빔밥을 파는 도시락 가게를 최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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