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소동

2014.01.15 20:58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영화관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찜찜한 기분을 못내 떨치기 어려웠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1970~80년대의 데자뷰를 느끼는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굳이 내 돈을 내면서 두 시간 남짓 갇힌 공간에서 ‘확인사살’까지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 직전의 식사 모임에는 같은 대학의 입학 동기생 넷이 함께 자리했는데, 나를 제외한 셋이 전과자였다. 한명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다른 한명은 국가보안법, 나머지 한명은 폭력(!), 게다가 그중 한명은 전과 2범이었다. “너도 물고문 당해봤느냐?”라며 낄낄거리는 그들 사이에서, 적당히 공부하며 적당히 노는 지극히 정상적이었던 내 학창시절은 순간 “비정상”으로 둔갑하고 말았다. 그렇게 <변호인>을 보러 갔고 예상했던 바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영화는 끝이 났다.

[경제와 세상]헛소동

아마도 그 동기생 셋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교도소를 들락거리던 무렵, 조용한 학생이었던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알려진 어느 강사의 수업을 그저 지적 호기심만으로 듣게 되었다. 과연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경제정책론’이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그가 다룬 내용은 소비에트 공업화 논쟁이었는데, 물밀듯이 몰려와 수강신청을 했던 운동권 학생들의 의표를 찌르기라도 하듯 교재는 E H 카의 <러시아혁명사>였다. <변호인>에서 언급되는 바람에 새삼스럽게 인터넷 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고 있는 바로 그 E H 카. 아무리 접어주고 해석해도 좌파라고는 하기 힘든 역사학자의 책이었으니, 폭압적인 군사정권 아래 변혁 의지로 불타오르던 젊은 피들을 만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E H 카보다는 조금 왼쪽이고 싶되 운동권 학생들보다는 오른쪽이고 싶던 나로서는 한 학기 내내 어정쩡한 위치에서 헤매야 했다.

그 시절의 어정쩡함이 개인적인 불편을 넘어 역사의 후퇴로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무려 사반세기가 지난 오늘 <변호인>을 통해 새삼 확인한다. 셰익스피어를 읽거나 연애만 하기에도 바빴어야 할 스무 살짜리들이 국가와 혁명을 고민해야 했던 시절, 그러나 영화 속의 국밥집 아들처럼 야학에서 “아침에 낳았다 하여 아사코라 이름을 지었다” 따위의 수필을 가르친 “순진무구”한 학생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감옥에 보낸 것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말이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북한의 통일정책 관련 문서를 읽었거나 소지하고 있다가 끌려간 “확신범”들에 대한 국가권력의 테러는 정당한 것인가? 심지어는 남파간첩이라는 이유로 두들겨 패며 전향을 강요하던 야만을 지적하고 기억하는 것은 이적행위일 수밖에 없는가? 모든 현실이 그러하듯 역사는 “순진무구한 피해자”와 “절대적 가치를 앞세운 가차 없는 투쟁”의 사이, 그리고 “정상”과 “비정상”의 사이에 존재하는 법이 아니던가? “정상”에게만 적용되는 민주주의와 인권이란 결국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이들에 대한 억압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반국가사범에 대한 변호인 접견권을 제한하는 법률을 만들자는 어이없는 주장이 인터넷 댓글도 아닌 국회의원 입에서 나오는 코미디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만들어진다.

최소한의 근대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중간지대를 없앰으로써 우리 사회의 수준이 고작 몇십 년 전 김수영이 “김일성 만세”라는 시를 쓰던 시절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 그 어이없음은 이미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 모든 파업은 “불법” 파업이고 모든 경쟁은 좋은 것, 또 모든 무엇무엇이 국가라는, 안보라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린다. 바야흐로 경제가 정치를 결정한다는 고전적 이론은 정치, 아니 국가의 편수(편집수정)로 상징되는 담론의 장악 시도가 경제까지 결정한다는 국면적 명제로 수정되어야 한다.

위대한 사랑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기억의 잔해로 남을 뿐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하지만 사랑하던 순간의 진정성, 적어도 그것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조차 스러지고 마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도 헛소동,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일에 떠는 야단법석(Much ado about nothing)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끝나고 말 이 헛소동 속에서, 그러나 보편적 가치마저 잃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꿋꿋하게 끝까지 맞서되 또 다른 헛소동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것, 데자뷰의 시절에 되새겨보는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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