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광수의 시대

2014.09.29 21:28 입력 2014.09.29 21:35 수정
전우용 | 역사학자

“세종대왕이 한글만 안 만들었어도 국어 시험 안 봐도 되는 건데….” “맞아. 그럼 영어만 배우면 되잖아. 세계화 시대에 영어 못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국어는 왜 배우라는 건데.” 몇 해 전 길에서 우연히 들은 중학생들의 대화다. 그들의 철없는(?) 대화를 들으며 일제 말 조선총독부가 조선어 과목을 폐지했을 때 조선인 학생들과 학부형들의 반응이 떠올랐다. 전문학교와 대학 진학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되는 과목, 열심히 공부하면 할수록 ‘조선인’이라는 수렁에 빠져들어 당당한 ‘일본 국민’ 되는 데에 지장을 주는 과목, 이런 과목을 더 안 배워도 되는 새로운 현실에 기뻐한 자들이 많았다.

[세상읽기]다시 이광수의 시대

물론 조선어 연구에 목숨을 건 학자들도 있었고, 조선어 교육 폐지는 조선 민족을 말살하려는 짓이라며 분노하는 사람도 많았으나, 그 시대의 소위 ‘식자층’ 중에는 이들을 ‘시대의 흐름을 모르는 자’나 ‘제 자식 고등교육 시킬 능력도 없으면서 불평만 늘어놓는 자’로 매도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 해방 후 제1회 서울대학교 입시에 국어 과목을 넣는 데에도 반대했다.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몇 년씩 옛 국어(일본어)만 공부해 온 학생들에게 새 국어(한국어) 시험을 치르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었다.

1920년대에 이광수는 ‘조선인의 타락한 민족성을 개조하여 독립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서는 일본 통치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정치적, 산업적, 교육적 훈련을 통해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일본은 조선 민족을 괴롭히는 적이 아니라 조선 민족이 보고 배워야 할 스승이었다. 그의 이런 주장은 조선총독부 관리나 조선식산은행 직원이 된 조선인들, 또는 되려고 하는 조선인들에게는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는 묘용이 있었다. 일본 통치에 협력하면서 일본인들에게 배우는 것도 조선 민족의 실력을 기르는 방편이라는데 거리낄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데 이광수는 얼마 안 가 자기 논리의 결함을 깨달았다. 조선인을 일본인과 비슷한 민족으로 ‘개조’하는 것보다는 조선인을 그냥 일본인으로 만드는 게 더 빠르고 확실한 길이었다. 결국 그는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바꿨고, 꿈도 일본어로 꾸는 모범적인 일본인이 되었다. 그의 주장에 위안을 얻었던 추종자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나약하고 타락한 조선 민족을 그가 보기에 ‘세계 일등’인 일본 민족으로 만들어주는 게 진정 조선 민족을 위하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그랬기에 정부 수립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서도 당당하게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조선 민족이 일본 민족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일본 민족이 조선 민족을 동등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몰랐다. 일본 식민 권력은 극소수의 조선인에게만 본보기 삼아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

근래 이광수의 주장 덕에 양심의 가책을 덜었던 자들이나 이광수와 비슷한 행보를 보였던 자들에게서 ‘친일파’라는 딱지를 떼어주자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여기서 출세하면 좋지만, 그게 안되면 미국에서 살게 하려고.” 그 자신이 미국 영주권자이면서 미국 시민권자인 아들을 자랑하는 어떤 ‘사회 지도층’이 털어놓은 내심이다. 이게 이광수 사상의 핵심이다. 세계화 시대에 국적 선택은 자유이고, 제 자식 ‘더 살기 좋은 나라’ 국민이 되게 하려는 부모의 욕망도 탓할 거리는 못된다. 하지만 세계주의자면 세계주의자답게, 초국가주의자면 초국가주의자답게들 살았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들이 공직이 눈앞에 어른거리면 ‘애국자’로 돌변하여 자기 생각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주의라고 강변한다. ‘이광수는 친일파가 아니라 선각자’라는 사람들의 애국하는 방식은, 조선 민족을 말살하는 것이 조선 민족을 위하는 길이라 믿었던 이광수의 ‘애족’하는 방식과 다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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