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의 시, 교과서 삭제를 반대한다

2018.04.17 21:19

정권 교체기마다 골칫거리 중 하나가 교과서 문제였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아버지 콤플렉스’ 때문에 단일 교과서 제정을 강행, 큰 논란을 일으켰다. 최근에는 미투 운동으로 교과서 문제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정희진의 낯선 사이]고은의 시, 교과서 삭제를 반대한다

지난 2월27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의 곽상도 의원(자유한국당, 대구 중구·남구)은 작년에 문화체육관광부가 고은·이윤택·오태석씨에게 8억6700만원을 지급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고은의 작품을 교과서에 삭제할 생각이 없느냐”며 ‘의기양양’하게 대정부질문에 나섰다.

이에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고은 시인의 시는 중학교 교과서에 1개, 고등학교 교과서에 10개 등 총 11개가 실려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저작권은 발행사가 갖고 있다”며 교과서 발행사와 삭제 여부를 논의할 것임을 ‘거듭’ 공언했다. 인상적인 점은 김상곤 부총리와 곽상도 의원, 즉 ‘여야’가 교과서에 대해 같은 인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고은씨의 시가 교과서에서 삭제되지 않기를 바란다. 김기덕, 이윤택, 오태석씨도 마찬가지다. 나는 박근혜 정권 당시 국정교과서 제정에도 ‘찬성’했다. 물론 그 전제는 여성노동과 노예노동을 중심으로 “내가 쓰겠다”는 것이다. 여성과 노예 노동을 1000년 정도 배운 후에, 좌우 논쟁을 시작해도 늦지 않다.

모두가 동의하는 올바른 역사는 없다. 역사처럼 당파적인 담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국민의 역사로서 국사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모든 역사는 누군가의 입장에서 특정 세력의 이해를 대변하는 주관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사실(事實)’을 사실(史實)로 만드는 과정이 역사이다. 중립적, 보편적 역사가 가능하다는 근대적 역사관에 대한 도전은 “역사는 이어지거나 수레바퀴처럼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는 베냐민의 주장부터 재일한국인 사학자 이성시(李成市)의 역작 <만들어진 고대(古代)>에 이르기까지 이미 수많은 비판이 이루어져왔다.

미투는 젠더(남성과 여성 간의 권력관계)뿐만 아니라 ‘문화혁명’에 준하는 사건으로, 우리 사회 전반의 뿌리 깊은 인습을 재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학에 문외한인 나조차 오래전부터 고은씨의 범법 행위를 알고 있었다. 내용도 알려진 사실보다 심각하다. 그의 행동은 상습적인 범법일 뿐 한량문화도, 기행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시가 계속 교과서에 실리기를 주장하는 이유는 ‘문학적 업적’ 때문이 아니다. 나는 원래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서사시, 대하소설… 한국의 일부 남성 문인들은 자신을 예술가가 아니라 역사 서술의 주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여성에 대한 폭력의 구조 중 하나다. ‘내가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민족을 대표하기 때문에’ 타인은 없는 존재이거나 존재하더라도 그·그녀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 그래서 나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폭력의 원인이다.

친일과 반공으로 사익을 챙겨온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불가피하다고 믿어온 일부(?) 진보진영의 자기 직면은 지금부터다. 그의 작품이 교과서에 남아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교과서에는 모범적인 저자와 글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현실, 실패한 역사도 포함되어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노벨상 타령”으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의 서구 콤플렉스와 남성 패거리 문화를 영원히 기록하기 위해서다. “이런 시를 쓴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고 한국 사회는 그를 숭배해 왔지만, 여성들의 투쟁이 있었다”고 적어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탄생한 시, 성폭력 가해자가 연출한 작품은 무조건 졸작 혹은 걸작인가. 교과서는 이를 논쟁적으로 제시하는 인식론이 되어야 한다. 김기덕 감독은 <해안선> <나쁜 남자> <빈집> <스톱> 등 작품의 완성도 자체가 황망한 경우부터 목불인견인 영화, 그만이 만들 수 있는 수작까지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왔다. 공과를 따지기보다 인간과 사회는 복잡하고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유하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투명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과서를 포함, 현실을 세탁한 모든 텍스트는 ‘껍데기’다. 우리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책들은 넘치고 넘친다. 교사는 말할 것도 없고 학생들은 한국 사회의 실제 모습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현실과의 괴리로 인한 갈등도 적어지고 이후 현명한 대처도 가능해진다. 교과서는 우리를 인식할 수 있는 교사이자 반면교사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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