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국회 앞에서 멈춘다

2019.03.04 20:45 입력 2019.03.04 20:46 수정

‘민주주의는 법원 문턱을 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러 논의를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과도하게 법원의 송사에 이르게 되는 현실을 빗대어 생긴 말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의 뒷받침 없이 개혁은 존재할 수 없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열망했던 촛불의 힘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지 어느덧 2년여가 되어간다. 헌정질서를 유린한 전직 대통령은 수감되었고, 전직 사법부 수장 역시 법의 심판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은 일들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법적 제도와 구조적 개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세상읽기]민주주의는 국회 앞에서 멈춘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월15일 국가정보원·검찰·경찰 개혁 전략회의에서 “국정원·검찰·경찰 개혁은 정권의 이익이나 정략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바로 세우는 시대적 과제”라고 강조하면서 “입법을 통한 개혁의 법제화와 제도화”를 요청했다. 대통령이 요구한다고 여소야대 국회가 쉽게 움직일 리 없고, 대통령부터 야당과 더 많은 대화와 타협을 시도해야 할 시점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국회의 역할이 중요한 상황에서 국회가 보이지 않는다.

2018년 12월15일 여야 5당 원내대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방안 검토와 선거제도 개혁 관련 법안의 1월 임시국회 합의 처리 등을 담은 합의문을 발표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또한 국민의 80%가 찬성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와 국정원 개혁 등 권력기관 개혁도 한국당의 발목잡기에 막혀 조금의 진전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0년 4월이면 제21대 국회의원선거가 진행될 것이고, 이제 조금 있으면 정치판의 모든 이슈가 선거 국면으로 전환될 것이다.

국민이 요구하는 입법 개혁을 나 몰라라 하고, 불필요한 정쟁만을 반복하며 재판청탁, 채용청탁, 불필요한 외유와 성희롱, 심지어 헌법정신을 부정하는 ‘5·18 망언’까지 일삼았지만, 반성하는 모습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지금 국회는 모든 개혁 법안이 집결되고, 논의되어 처리해야 하는 장소지만, 단 하나의 법안도 통과할 수 없는 적폐의 철옹성이 되어가고 있다. 대화와 타협은커녕 논의의 장 자체가 열리지 않는다. 이러고도 국회가 스스로 개혁의 주체를 자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집권여당인 민주당의 무기력과 태만이다. 한국당은 애초부터 선거법 개혁 자체를 거부해왔지만, 여당은 문재인 대통령이 당 대표로 있었던 2015년부터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당론으로 채택했고, 2017년에는 이 제도를 권역별로 도입한다는 대선 공약을 내걸었다. 그런데 여당이 되고, 당 대표가 새로 뽑히고 나자 무슨 계산인지 선거제도 개혁에 미온적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는 개혁에 애를 태우는데 집권여당이 이처럼 몸을 사리는 것은 아마도 당내 공천권을 행사하려는 세력의 노림수와 그들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의원이 많은 탓일 게다.

나관중의 <삼국지>에서 가장 극적인 대목 중 하나는 조조와 유비, 손권이 함께 자웅을 겨룬 ‘적벽대전’이다. 제갈공명의 신출귀몰한 전략과 계책이 유난히 돋보이지만, 내게는 노숙이라는 고지식한 신하가 가장 돋보였다.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손권에게 항복을 권고했을 때, 동오의 장수와 신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천자를 앞세운 조조의 명분과 백만 대군의 위세에 짓눌려 그에게 항복을 권했다. 오로지 노숙만이 항복을 만류하며 분을 참지 못하고 손권에게 말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조조에게 항복하더라도 돌아갈 고향 땅이 있고 그곳에서 말단 관직이나마 차지할 수 있습니다만, 장군께서 항복하신다면 대체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자는 국민의 염원과 개혁의 열망을 뭉개고 앉아 지역구 예산만 챙기고, 공천 받아서 배지만 달면 되는 국회의원이라면 그들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청산해야 할 적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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