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전통 각하’를 되살려내나

2019.03.13 20:23 입력 2019.03.13 20:28 수정

“왜 이래!” 구순 노친네의 목청은 쩌렁쩌렁했다. 걸음걸이부터 힘찼다. 골프라운딩을 두 바퀴 하고도 남을 성싶다.

[기자칼럼]누가 ‘전통 각하’를 되살려내나

참 기이한 일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 아니 요즘은 더 정확히 그냥 ‘전두환씨’가 새삼 미디어를 장식하고 있다. 맞서 싸우던 이들은 하나둘 떠나고 이 늙은 내란수괴는 보란 듯이 강건하고 당당하다. 먼저, 29년 만이라던가. 서울 연희동 골목 장면을 보자니 개인적으로 두 개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하나. 바야흐로 ‘땡전뉴스’가 판을 치던 1984년 6월 어느 날. 당시 한 초등학생은 학교의 소집명령에 학우들과 수㎞를 걸어서 경북의 고속도로 인터체인지(IC)에 이르렀다. ‘전통 각하’께서 고속도로 개통을 축하하려고 지나가실 때 손을 흔들기 위해서다. 광주를 밟고 최고권력자가 된 전씨가 동서화합을 명분으로 급조한 88올림픽고속도로다. 워낙 서둘러 2차선으로 만든 탓에 한동안 국내 사망률 최고 ‘죽음의 고속도로’로 악명 높았다. 그날 한참을 기다려도 그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정작 각하께선 헬기로 지나갔단다. 대구에서 대학교에 다니던 동네 형은 방학 때 와선 “전두환 일당이 총으로 사람을 쏘고 권력을 뺏었다”는 무서운 얘기를 들려줬지만 말귀를 알아먹기엔 어렸다.

둘. 1995년 봄이던가. 대학교 학생회관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 밖이 술렁거리고 시끄러웠다. 일단의 선배들이 두 줄을 지어 교정을 다니며 구호를 외쳤다. “독재자 전두환을 처벌하라!” 더러는 야상 군복까지 입은 복학생 선배들이 대학도서관에서 입신양명을 위해 공부하다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들고일어난 것이다. 공소시효 만료를 앞둔 시점이었던 것 같다.

역사에는 ‘문민정부’ 김영삼(YS) 정부가 전두환·노태우의 12·12 쿠데타를 단죄한 것으로 돼 있다. 앞서 3당 합당에 대한 ‘야합’ 비난에 “호랑이를 잡으러 굴로 들어왔다”고도 했던 YS다. 광주 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5·18 특별법도 만들었지만 과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 시민사회는 전두환·노태우씨를 검찰에 고소, 고발했다. 그날 도서관에서 책을 잠시 덮고 뛰쳐나온 선배들의 함성은 그런 연장선에 있다. 훗날 한나라당으로 제17대 국회의원 금배지까지 단 장윤석 서울지검 공안1부장은 1995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불기소 처분했다. 헌법재판소 결정까지 겪고서야 기소돼, 끝내 두 쿠데타 주역은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반란수괴 등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런데도 저들은 틈만 나면 왜 버젓이 갈등을 부추길까. 북한군 개입설까지 퍼뜨리며…. 이는 마치 전범들을 영웅시하고 위안부, 나아가 독도까지 트집 잡아 끊임없이 잡음을 즐기는 일본 우익과 닮은꼴이다. 단죄를 못한 탓이다. 독일 등지에도 전쟁범죄를 정당화하고, 인종주의를 신봉하는 늙은 옛 나치단원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거의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다.

사실 지만원씨 발언 등이 불거져나온 맥락이나 시점이 중요하다. 바로 정부의 지지도가 떨어진 때다. 독버섯의 포자는 그늘진 어딘가에 늘 퍼져 있다. 역사를 되돌리려는 자들은 음습한 틈을 노린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이들이 슬금슬금 피어날 것이다. 그러다 훗날 전통 각하의 위패가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모셔지지 말란 법이 없다.

그날 도서관을 뛰쳐나온 선배들께 늦게나마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한다. 그 시대의 멍에를 짊어진 386정치인들이 소임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망언을 잠재우고, 민주화를 꽃피운 이름들을 더 아름답게 빛낼 열쇠가 될 것이다. 단지 전두환 때리기에 머물러서도 안된다. 그것이야말로 저들이 뻔한 수작을 걸어온 이유일 수 있어서다.

한편으론 각하의 만수무강을 빈다. 왜 이러냐고? 진솔한 사과도 없이 몸져누우시기엔 아직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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