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길이 되려면

2019.05.13 20:58 입력 2019.05.13 20:59 수정
장은교 토요판팀

“어릴 적에 우리집에 연탄을 땠어요. 근데 연탄을 때니까 방이 아주 따뜻하고 나무를 안 해와도 돼서 힘이 덜 들었어요.”

연탄이라니. 갑자기 왜 연탄 얘길 하실까. 지난 4월29일 삼성백혈병 산재사망자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64)를 인터뷰하던 중이었다.

[기자칼럼]아픔이 길이 되려면

황씨는 2007년 삼성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던 둘째 딸을 잃고 10년 넘게 삼성을 상대로 싸웠다. 차라리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더 희망이 있겠다는 만류와 돈 뜯어내려는 수작이라는 조롱 등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황씨는 재판에서 삼성을 이겼다. 과학과 의학과 법률의 논리로 중무장했던 삼성은 황씨의 질긴 투쟁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삼성의 거액 회유를 뿌리치고, 삼성직업병피해자들을 위한 인권단체 ‘반올림’을 만들어 삼성으로부터 사과와 보상, 재발방지 약속도 받아냈다.

보상도 사과도 끝났지만, 황씨는 속초에서 택시운전을 하다 ‘일’이 있을 땐 전국으로 달려간다. 지난 4월28일엔 마석 모란공원에 갔다. 태안화력발전소 산재사망자 김용균씨의 추모조형물 제막식에 참석했다. 세계 산재사망노동자 추모의 날이기도 했던 이날 황씨는 마이크를 잡고 “우리 정부는 정신 차려야 한다”고 말했다. “수많은 노동자가 직업병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정부가 그런 기업을 처벌하긴커녕 상을 주고 세금을 수천억원씩 깎아줍니다. 학교에서 노동자 교육은 시키지도 않고 기업에서 일하라고 합니다. 노동자는 안 죽으려야 안 죽을 수가 없고 안 다치려야 안 다칠 수가 없습니다.”

29일엔 국회에서 열린 ‘산재·재난참사 유가족이 기업책임강화 법안발의 의원들과 함께하는 이야기마당’에도 참석했다. “이런 자리 하는 걸 우리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업과 정부가 노동자를 핍박하고 압박하고 병들고 죽게 만들어서…. 우리 아들·딸들이 더 이상 병들고 죽지 않기 위해서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올림’의 이상수 활동가는 “사실 아버님이 안 아픈 곳이 없다”고 했다. 삼성과의 합의 이후 마치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이 온몸이 통증을 쏟아내고 있다고 했다.

궁금했다. 아무리 좋은 세상이 와도 그의 딸은 살아돌아오지 않는다. 딸의 죽음을 많은 이들 앞에서 계속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부모에겐 참기 힘든 고통이다. 게다가 야박한 인심은 자식을 잃은 아비도 조롱하고 모욕한다. 그가 이제 자신만의 평안을 추구한다고 해도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을 굳이 감내하며, 그가 남의 자식들을 위해 나서는 이유가 정말 궁금했다.

황씨가 꺼낸 대답은 ‘연탄’이었다. “근데 그 연탄이란 것은 광산노동자들이 자기 목숨을 다 바쳐서 캐낸 거잖아요. 제가 택시운전을 해서 먹고살 수 있었던 것도 누군가가 비포장도로에 포장을 깔끔하게 해줬기 때문이에요. 여태껏 살면서 나는 다른 노동자들로부터 엄청난 혜택을 받고 살아왔거든요. 그럼 나도 다른 노동자들, 미래의 노동자들에게 무언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노력해야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겨울 황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얼굴이 너무 소년 같아서 놀랐다. 나쁜 일이라곤 당해본 적이 없는 듯한 해사한 얼굴로 그는 딸의 죽음을, 다른 이들의 생명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 맑은 얼굴의 이유를, 자기 몸이 아파가면서도 계속 목소리를 내는 이유를 이번에 만나고서야 알았다. 황상기씨는 연탄 한 장의 따뜻함을, 그 따뜻함 뒤에 숨은 수고로움을, 그 수고로움 뒤에 스러진 많은 생명을 몸에 새기고 살아가고 있다.

김승섭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건강한 존재들.” 황상기씨, 그리고 그와 손잡은 ‘산업재해 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의 가족들이 모두 안녕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