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맥주병

2016.06.07 17:06 입력 2016.06.07 20:58 수정

“그날 베이징대 서문 앞을 지나는데 기숙사 창문에서 맥주병이 계속 떨어졌어요. 엄한 감시에 시달리던 학생들이 던진 건데, 작은 병(小甁·샤오핑)의 발음이 덩샤오핑(鄧小平) 이름과 같잖아요. 학생 민주화 시위를 무력 진압한 덩샤오핑에 대한 반감을 그런 식으로 표출한 거죠.”

[특파원칼럼]사라진 맥주병

중국인 지인이 들려준 1994년 6월4일의 기억이다. ‘그날’은 인민해방군이 민주화 시위를 유혈 진압한 톈안먼(天安門) 사건(중국명 6·4) 5주년이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물병과 빵 봉지를 든 군인 여러 명이 베이징대 남문 근처에 대기하고 있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서문 맞은편 가로등 아래에서 ‘베이징만보’를 읽는 척하며 주위를 경계하던 사복 경찰들도 눈에 띄었다고 했다. 엄혹한 시절이었지만 당시 중국 대학생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과 투쟁을 했다. 지금은 평범한 40대 중산층인 그가 대학 시절 톈안먼 사건을 추모하려 일부러 베이징대학에 들를 정도로 열정적이었다는 사실도 꽤 의외였다.

톈안먼이 광장을 잃어버린 지 올해로 27년째다. 톈안먼 광장은 세계 최대 규모인 44만㎡ 넓이로 100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이 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톈안먼에 걸린 초상화 속 마오쩌둥은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그곳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신분증 검사와 보안검색대를 거쳐야 한다. 톈안먼 앞에서는 자동차를 마음대로 정차할 수 없고, 집회를 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게 만든 광장의 본래 기능은 완전히 상실됐다. 그리고 톈안먼 광장에서 일어난 ‘그날’의 사건도 완벽히 ‘금기어’가 됐다.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3일 브리핑에서 톈안먼 사건과 관련한 질문을 받고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30여년간 경제·사회 등 각 방면에서 세계가 놀랄 만한 성취를 거뒀다”며 “이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가 중국 상황과 많은 인민들의 근본이익에 부합하고 전체 인민의 소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답했다. 이 대답은 마치 부패척결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과오를 경제발전 성과로 덮으려는 것처럼 들린다. 잘살게 됐다는 결과가 면죄부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일까.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도 지난 1일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캐나다 기자가 중국 인권 문제를 언급한 데 대해 분노한 그는 기자에게 “당신은 중국이 가난해서 아무것도 없던 상황에서 6억명 이상의 인민들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한 사실을 알고 있나. 중국이 1인당 국내총생산(GDP) 8000달러의 세계 2위 경제대국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인권을 물었는데 금전으로 답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중국 당국의 의도가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듯하다. 중국 대학생에게 톈안먼 사건에 대한 생각을 물었더니 “6·4(톈안먼 사건)는 별로 특별하지 않다. 그저 중국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징검다리 같은 사건일 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서는 1990년부터 매년 6월4일 톈안먼 사건 희생자를 위한 촛불집회가 열린다. 그런데 올해 참가자 수는 지난해보다 1만명이나 줄었다. 중국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홍콩학생연합회가 톈안먼 사건을 중국 내부의 일로 치부하고 행사 불참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홍콩에서조차 빅토리아 공원에서 촛불을 드는 시민들이 줄고, 베이징의 대학가에서도 ‘맥주병’이 사라졌다. 신문으로 위장하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던 경찰들도 함께 사라졌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데, 경제발전의 열매를 누리며 어두운 역사는 잊어버리라는 중국의 속내가 두렵다. 그 검은 속내가 통하고 있다는 것은 훨씬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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