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를 생산하지 않는 나라를 위해

2017.04.30 19:03 입력 2017.05.04 11:12 수정

지난 한 주간 대통령 후보들의 입에서 구구절절 반복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개는 여성 혐오와 성소수자 혐오 정서를 깔고 있어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반동적입니다. 1980년대 민주화의 열망과 함께 피어올린 페미니스트 운동의 역사와 1990년대부터 진행된 성소수자 운동의 성장, 최근 반혐오, 반차별 운동의 확산을 환기하면 퇴행이라 할 것입니다.

[정동칼럼]‘타자’를 생산하지 않는 나라를 위해

정의는 수렴의 규칙이 아니라, 분기의 규칙에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회정의를 지향하는 우리는 차이를 이야기하면서도 평등을 지향할 수 있을까요? 차이는 단순히 수평적으로 배열된 평면적 다름이 아닙니다. 단순한 인정의 대상도 아닙니다. 차이는 집단 간 위계적 관계 및 집단과 제도 간 비대칭적 상호관계의 기제이자 효과입니다. 평등의 반대말이 차별이듯, 차이의 반대항은 평등이 아니라 ‘같음’입니다. 평등이란 단어에는 ‘이미’ 사회적 지위 차이에 대한 인지와 변혁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정치 철학자 아이리스 영은 차이를 무시한 채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게 되면 세 가지 차원의 결과를 초래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의 주장을 한국 사회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첫째, 기득권 집단의 차이에 대한 무지는 다른 문화와 경험을 가지고, 다른 사회화의 능력을 지닌 집단의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초래합니다. “동성애에 반대한다” 혹은 “엄벌해야 한다”고 공적 영역에서 말할 수 있는 자는 이미 기득권 집단의 일원입니다. 그의 언설은 다른 성적 지향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구조적 차별을 용인하는 행위가 됩니다.

둘째, 집단 간 차이가 소거된 보편적 인간이라는 이상은 기득권 세력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특이성을 망각하게 합니다. 위치의 상대성을 인지하게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성문제’는 있되 남성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대부분의 가해자가 남성인 성매매, 성폭력, 가정폭력, 성희롱은 명백히 ‘남성문제’라 명명되어야 함에도 이에 대한 이해도, 언어도 부재합니다. 더군다나 억압받는 집단은 늘 ‘특수한 것’으로 표기되고, 개인의 문제는 종종 집단 전체에 내재한 속성의 문제로 환원됩니다. 박근혜·최순실 사태 이후 가장 많이 회자된 ‘하여튼 여자는 안돼’, ‘여자가 대통령이 되니…’, ‘당분간 여자가 대통령 되긴 글렀어’ 등의 발언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셋째, 보편적 관점, 다수의 이름이라는 미명하에 기득권의 이익은 정당화되어 왔고, 억압받는 집단의 관점은 부분적이거나 편파적이라고 부정당해 왔습니다. 중립적으로 보이는 기준에서 파생한 다른 집단에 대한 폄훼는, 이에 속한 사람들의 자기비하와 자기혐오까지 초래합니다. ‘나’는 여자라서, 장애인이라서, 얼굴이 검어서, 혹은 성적 소수자라서 부끄럽고 수치스럽기까지 합니다. 남자이기 때문에, 비장애인이라서, 백인이라서, 이성애자라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집단을 적극적으로 배제할 때 발생하는 불공평한 상황이 억압입니다. 타자는 존재가 아닙니다. 불평등한 억압구조를 통해 상대적 약자가 타자화되는 것입니다. 차이 그 자체가 아니라 차이의 의미, 차이가 구성되는 방식 및 조건과 대적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차이의 의미 자체가 정치적 투쟁의 장이 될 때, 차이는 집단 간 분리와 배제, 상호배타성이 아니라 구조적 변혁을 향한 긍정적 도구가 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차이가 차별이 되는, 차이가 타자를 생산하는 권력관계와 구조에 균열이 일어날 것입니다.

2017년입니다. 대통령 후보들은 식민지 냉전분단 독재체제, 이성애규범적 가부장체제의 산물임을 스스로 인정해야 합니다. 조만간 필연적으로 내파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시대착오적인 껍질들로부터 깨치고 나와야 합니다. 캠프의 핵심 영역에 포진하고 있는 주변의 인사들도 조속히 정리해야 합니다. 군사독재체제에서 자라고 봉건가부장으로부터 교육받은 이들은 다른 집단에 대한 억압을 통해 명시적, 비명시적 이익을 누린 기득권 세력의 핵심 구성원들입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차이들이 위계적으로 배열되어 있고, 이로 인해 억압받으며 종내는 고통스러운 생을 마감해야 하는 시민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공감하기 어려운 분들입니다.

부정의한 상황에 대한 적확한 인식만이 적절한 진단과 효과적 해법 모색의 출발점이 됩니다. 조금 더 나은 대한민국은 차별이 생산되는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부디 거짓된 해방의 약속이 아니라 해방의 과정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고 성실히 실천하는 대통령의 탄생을 기원합니다. 정의로운 탄생을 위해 소중한 한 표가 행사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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