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복제 시대의 외설

2018.06.21 21:03 입력 2018.06.21 21:05 수정

흔히 예술과 외설은 한 끗 차이라고들 한다. 성 정치학이 그 한 끗에 들어있다. 지난해 작고한 미술비평가이자 작가 존 버거는 유명한 그의 저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에서 응시라는 행위에 담긴 권력의 문제를 명료하게 제시하였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 미술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여성의 벗은 몸은 남성의 관음증적 시선을 위한 대상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림의 실제 주인공은 그림 앞에서 그 여성의 몸을 시각적으로 소비하는 남성이라는 것이다. “그림 속 인물이 누드가 되는 것은 그를 위해서다.”

[정동칼럼]디지털 복제 시대의 외설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예술과 외설의 불편한 공존과 시선의 권력에 대한 이 논의는, 버거의 BBC 텔레비전 강좌와 책이 발표된 1972년에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버거의 책이 출판된 영국에서 성차별 금지법이 만들어진 것이 1975년이었으니 말이다. 그의 비판에 힘입어 여성주의 미술그룹 ‘게릴라 걸스’는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벌거벗어야 하는가?”라는 표제의 포스터를 제작,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현대미술에서 여성예술가는 5% 미만인 반면 누드화의 85%가 여성이라는 점에 항의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영화, 음악, 광고산업을 포괄하는 대중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여성뿐 아니라 남성 역시 시각적 소비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남성적 시선이 여성을 대상화하고 성적으로 소비한다는 존 버거의 통찰은 (경직된 젠더이분법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음란물 산업의 고정된 젠더 구도가 보여주듯이 아직도 유효하다. 디지털 기술의 보편화 덕분에, 시선은 르네상스 회화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보다 훨씬 광범위한 인터넷의 세계에서 은밀하고도 보편적인 폭력의 기제로 작동할 수 있게 되었다. 카메라와 컴퓨터로 대중이 일상적으로 재현행위에 참여하고 이미지를 유포할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지난달 양예원씨가 3년 전 ‘비공개 스튜디오 촬영회’의 모델로 일하면서 성추행을 당했고 사진들이 유포되어 피해를 입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사실관계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는 동안 정작 ‘비공개 스튜디오 촬영회’라는 의아한 관행에 대한 물음은 상대적으로 덜 제기되었다. ‘출사’로 지칭되는 이 비공개 촬영은 사실상 동호회 등 회원제로 운영되는, 아마추어 사진예술을 빙자한 개인용 음란물 제작활동이다. 관련 기사에 따르면 “전문 사진사보다는 호기심과 성욕 해소를 위해 참여하는 일반인들이 많으며, 찍은 사진은 비공개(개인 소장용)로 하기로 합의 후 촬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2018년 6월19일 중앙일보).

하지만 디지털 영상물의 프라이버시란 현실적으로 이미 역설이다. 또 계약이라 한들, 그것은 쌍방의 지위가 동등하지 않음을 형식적으로 은폐하는 장치가 되기 십상이다. 촬영된 본인의 동의 없이 이미지를 유포하여 음란물로 소비하는 일은 범죄이다. 옷 모델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등의 거짓 광고로 수배한 모델과 과연 강압이나 착취 없이 계약을 체결하는지에 대한 조사와 함께 영상물을 임의로 유통하지 않는다는 합의가 지켜지지 않는 데 대한 철저한 수사와 처벌이 필요하다.

경찰은 실제로 지난 19일, 이러한 영상물을 게시하는 음란물 사이트를 운영해온 사람들을 검거했다. 양예원씨와 같은 피해 모델이 현재 파악된 바 여러 명이고, 이 사이트에서 확인된 사진 유포 피해자가 150명이 넘는다고 한다. 놀라운 점은, 양예원씨의 폭로 이후 ‘출사’ 음란물에 대한 수요가 폭등하고 이 사진들의 불법적 거래가 급증했다는 사실이다. 강압에 의한 촬영, 동의 없는 유포에 대한 고발이 도리어 수요를 키웠다면, 이는 여성에 가해진 바로 그 강압성, 폭력성, 불법성 자체가 포르노적 욕망의 페티시라는 뜻이다. 그런데 ‘출사’ 음란물을 유포한 사이트는 인터넷에 유통되는 디지털 이미지를 제거하는 이른바 디지털 장의사 업체로부터 뒷돈을 받고 그 특정 업체의 광고를 사이트에 게재했다고 한다.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남성적 시선의 시장을 형성한 것으로도 모자라, 인권을 침해당한 여성들의 상처와 수치심까지 거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참기 어려울 만큼 악질적이다.

예술을 비롯한 재현행위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존 버거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온 바다.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포르노그래피적인 사욕을 충족하기 위해 예술을 흉내내는 것도 권력의 뒤틀린 자기표현일 것이다. 버거에게 영감을 주었던 발터 베냐민은 일찍이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 즉 탈신비화된 예술과 대중의 민주주의적 조우에서 혁명적 가능성을 발견했었다. 그러나 몰카 범죄, 리벤지 포르노, 출사 음란물이 난무하는 오늘, 디지털 복제 시대의 외설에서 우리는 폭력적 욕망의 디스토피아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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