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와 조롱 사이, 잊혀져 가는 톨레랑스

2015.01.11 20:25 입력 2015.01.11 21:41 수정
박영규 | 중부대 초빙교수

‘전능하신 하느님의 점지를 받아/ 시인이 따분한 이 세상에 나타날 때/ 그의 어머니는 질겁하고 신을 모독하는 마음 가득하여/ 측은해하는 하느님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쥔다./ 어느 날 밤 끔찍하게 생긴 유대 계집 곁에/ 시체 곁에 또 하나의 시체가 있듯이 나란히 누워/ 그 돈에 팔린 몸뚱이 곁에서 나는 생각했다/ 내 욕망이 포기한 저 서글픈 미녀를.’

[시론]풍자와 조롱 사이, 잊혀져 가는 톨레랑스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라는 시집에 실린 시다. 보들레르는 마흔여섯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생전에 테러를 당하지는 않았다. 시적 언어가 지나치게 거칠고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논란의 중심에 서기는 했었지만 보들레르 자신이 인종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은 적은 없다. 종교적으로 파문을 당한 일도 없다. 오늘날 보들레르는 프랑스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으로 칭송된다. 톨레랑스는 모든 걸 포용하는 이성의 힘이다. 진정한 톨레랑스는 인종과 계급, 정치적 성향뿐만 아니라 종교적 차이까지도 관용한다. 샤를리 에브도가 종교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성적으로 볼 때 큰 문제가 없다. 발가벗은 엉덩이를 곧추세운 채 엎드려 있는 마호메트를 보면서 이슬람교도들은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다. 교황이 풍자의 대상이 된 그림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똑같은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은 절대적이지만 종교는 상대적이다. 따라서 굳이 시비를 가리자면 모욕감을 느끼는 주관적 감정 자체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라면 그런 모욕감을 톨레랑스로 승화시키라고 가르치는 것이 옳다.

테러를 비난하면서도 샤를리 에브도의 선정성과 표현양식을 문제 삼는 양비론적 시각도 있다. 물론 풍자와 조롱은 다르다. 그렇지만 그 경계를 가르는 기준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다. 모든 풍자는 조롱이 될 수 있고, 모든 조롱은 풍자가 될 수 있다. 위대한 인류의 문화유산이라고 하는 수많은 고전들을 보라. 풍자가 아닌 것이 어디 있고, 조롱이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사마천의 <사기>도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조롱일 수 있고, 대통령을 빗댄 동물 그림도 예술가에게는 풍자일 수 있다. 풍자 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섬 라퓨타에는 희한한 관습이 있었다. 총리대신과 면담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용건을 가장 쉬운 말로 간결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면담이 끝나면 총리대신이 자기 말을 잊어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의 코를 비틀거나 배를 걷어차거나 팔을 꼬집어서 시퍼렇게 멍들게 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말한 안건이 완전히 처리될 때까지 그러한 행동을 반복해야 한다.’ 공무원들의 업무처리를 꼬집은 내용이다. 대중들에게는 통쾌한 풍자겠지만, 공무원들에게는 불쾌한 조롱이다. 톨레랑스의 범주와 대상을 제한할 경우 톨레랑스는 이미 톨레랑스가 아니다. 그럴 경우 차이는 차별로 둔갑되고, 그 차별은 또 다른 폭력을 낳게 된다.

올해는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상대성 이론의 요체는 우주에는 절대적 기준점이 되는 좌표가 없다는 것이다. 태양은 지구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기준점이 될 수 있지만 은하계에서 태양은 희미한 점에 불과하다. 무한한 우주에서 유한한 것들은 아무도 상대에게 기준이 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의 물리학 이론을 사회학에 대입하면 모든 것은 모든 것의 톨레랑스다. 동쪽은 서쪽의 톨레랑스고 서쪽은 동쪽의 톨레랑스다. 유럽과 아시아, 이슬람과 기독교, 유대인과 게르만인도 이와 같다. 이들이 창녀로 묘사되건 시체로 풍자되건 모든 존재가 서로의 톨레랑스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은 톨레랑스에 대한 지성의 빈곤이 만들어낸 문명사의 비극이다. 차이 나는 것들의 공존방정식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그 해답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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