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의 또 다른 이름 ‘동교동’

2009.08.18 16:15
최우규기자

‘동교동’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또 다른 이름으로 우리 정치사에 기록돼 있다.

[김 前대통령 서거]DJ의 또 다른 이름 ‘동교동’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엄혹한 시절이던 1980년 신군부는 언론을 검열했고, 신문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이름조차 쓰지 못하게 했다. 이에 신문들은 그를 ‘재야인사’ 또는 ‘동교동 인사’라고 에둘러 불렀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여서, ‘상도동 인사’로 불렸다. 양김씨의 집을 드나들던 인사들은 ‘동교동계’ ‘상도동계’로 일컬어졌고, 우리나라 야당사의 양대 인맥의 본산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5·16쿠데타가 일어났던 61년 동교동 자택에 입주했다. 강원 인제 보궐선거에서 처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였다. 처음에는 대지 70평이었는데 85년에 부근 땅 70평을 매입, 개축했다.

그의 미국 체류기간을 빼고 95년까지 35년 동안 내리 살면서 역정을 겪어왔다. 이 집에서 71년과 87년, 92년 세 차례 대통령 선거를 치렀고 평민당과 국민회의 등 제1야당을 탄생시켰다.

그의 정치생활에 굴곡이 많았던 만큼이나 동교동집도 험한 경우를 많이 당했다. 71년의 폭탄 테러, 72년과 82년 김 전 대통령 망명, 55차례 연금 등을 지켜봐 왔다.

동교동 사저에 대한 ‘음해성’ 유언비어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지하벙커’. 정치적 라이벌들은 이 사저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벙커가 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김 전 대통령은 믿을 만한 사람만 이곳으로 초청해 거대한 금고를 열어 정치자금을 안겨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실상은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서재가 있다. 이곳에서 김 전 대통령이 측근들과 면담을 하거나, 측근들이 그의 지시를 기다렸다고 김옥두 전 의원은 회고했다.

동교동 사저 안의 작은 정원조차 김 전 대통령의 질곡을 지켜봤다. 가택 연금 당시 그는 틈만 나면 정원의 꽃이나 작은 나무들을 공연히 옆 자리로 옮겨 심는 작업을 했다. 가신들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중앙정보부 쪽에 연이 닿는 사람이 “정보부에서 총재님을 연행하러 간다”는 연락이 왔다. 늘 메모하는 버릇이 있던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의 수첩들을 비닐에 싸서 몰래 들고 나와 정원의 꽃과 나무를 파내고 그 밑에 파묻었다고 한다. 옆에서 이곳을 사찰하던 경찰이나 안기부는 이를 예의 ‘꽃 옮겨심기’로 보고 넘어갔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95년 12월15일 일산으로 이사를 갔다. “동교동이 너무 번잡스럽다. 정계 은퇴 후 부부가 조용히 살려고 집을 지었다”고 설명했다. 동교동 사저는 큰아들 김홍일 의원이 대신 살았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는 청와대 관저에서 살았고, 대통령에서 물러나면서 다시 동교동으로 이사왔다. 2002년 12월 기존 주택을 헐고 연면적 198평, 지상 2층, 지하 1층의 양옥으로 새 단장했다. 지하층엔 경호 접견실을 마련하고, 60평 규모의 1층은 방문자를 위한 객실 용도로 꾸며졌다. 몸이 불편한 김 전 대통령을 고려해 실내 엘리베이터도 설치됐다. 이를 놓고 한나라당으로부터 ‘아방궁’이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이 집을 방문했던 이들은 김 전 대통령이 무엇을 중시하고 좋아하는지 느꼈다고 한다. 응접실 탁상 위에는 6·15남북정상회담 합의문이 새겨진 미니병풍, 노벨상 수상 당시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또 한 쪽 벽 서가에는 김 전 대통령이 가장 애청한 프로그램인 KBS TV <동물의 왕국> 비디오테이브가 꽂혀 있다.

그는 퇴임 후 줄곧 이곳에서 살면서 노년을 보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 별세로 ‘동교동’이라는 ‘정치용어’는 역사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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