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색·메달색·남녀노소·선수와 팬… ‘벽’은 없었다

2010.03.01 18:45 입력 2010.03.02 01:25 수정

경쟁자에서 동반자로 국적 떠난 축하·격려

이승훈 들어올린 세리머니 ‘잊지못할 감동’

여성·노인들도 겨울스포츠 매료 ‘세대공감’

<b>한국을 들어올린 세계</b> 지난달 24일 스피드스케이팅 1만m 시상식에서 이반 스코브레프(은·러시아)와 밥 데용(동·네덜란드)이 이승훈을 어깨 위로 번쩍 들어올리고 있다. 리치먼드 | 로이터연합뉴스

한국을 들어올린 세계 지난달 24일 스피드스케이팅 1만m 시상식에서 이반 스코브레프(은·러시아)와 밥 데용(동·네덜란드)이 이승훈을 어깨 위로 번쩍 들어올리고 있다. 리치먼드 | 로이터연합뉴스

밴쿠버 올림픽은 서로를 가로막고 있던 벽을 허문 잔치였다. 레이스가 끝나자 경쟁자는 동반자로 변했다. 순위에 따라 시상대 높이만 다를 뿐 서로를 축하하고 격려하는 것은 똑같았다. 이들이 엮어내는 꾸밈없는 드라마는 남자들에게 국한돼온 겨울스포츠 팬의 영역을 넓혔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온 국민들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언니, 오빠, 아들, 딸, 손자, 손녀가 보여준 투혼에 웃고 울었다. 선수와 팬의 거리도 무척 가까워졌다. 인터넷을 통해 선수와 직접 소통한 팬들은 “이상화 선수” “김연아 선수”가 아닌 “우리 태범이” “우리 연아”라고 불렀다.

<b>감싸안은 금과 은</b> 밴쿠버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에서 금메달을 딴 김연아(오른쪽)가 지난달 26일 시상식에서 은메달리스트 아사다 마오와 포옹하고 있다. 밴쿠버 | AP연합뉴스

감싸안은 금과 은 밴쿠버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에서 금메달을 딴 김연아(오른쪽)가 지난달 26일 시상식에서 은메달리스트 아사다 마오와 포옹하고 있다. 밴쿠버 | AP연합뉴스

◇ 경쟁자? 같은 길을 걷는 친구 = 가장 감격스러운 장면은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만m에서 나왔다. 경기 후 플라워 세리머니가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시상대에 오른 2위 러시아, 3위 네덜란드 선수가 각각 한쪽 어깨를 내어 1위 이승훈(한체대)을 태운 채 높이 들어올렸다. 동양인 최초로 스피드스케이팅 최장거리에서 우승한 이승훈에 대한 존경의 표시. 상상도 못한 세리머니였다. 네덜란드 팬들은 이날 레이스에서 네덜란드 선수를 한 바퀴 제치고 결승선을 끊는 이승훈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서로 다른 피부색과 통하지 않는 언어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쇼트트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쇼트트랙 선수들은 대회 마지막날 5000m 계주 시상식을 마친 뒤 은메달을 목에 걸고 금메달을 딴 캐나다 선수들과 밝은 표정으로 악수를 나누며 뒤엉켜 기념사진을 찍었다. 메달색이 결정난 뒤에는 국적을 떠나 모두가 친구이고 동반자였다.

◇ 메달색은 중요하지 않다 = 올림픽 성패의 척도로 받아들여온 메달색 구분마저 무너진 느낌이다. 금메달은 1등이라서 좋았고 은, 동메달은 세계 2, 3등이라서 또 좋았다. 흘린 땀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았다는 기쁨에 메달 색깔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두 차례 불운으로 메달을 놓친 성시백(용인시청)은 주종목인 쇼트트랙 500m에서 은메달에 머물고도 웃었다. 곽윤기(연세대)는 5000m 계주에서 은메달을 딴 뒤 ‘시건방춤’을 춰 박수를 받았다. 1500m에서 충돌해 은, 동을 놓친 이호석(경희대), 성시백도 손을 맞잡았다.

<b>하나된 응원</b> 김연아가 밴쿠버 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 출전한 지난달 24일 서울역 대합실에 설치된 TV 앞에서 시민들이 한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나된 응원 김연아가 밴쿠버 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 출전한 지난달 24일 서울역 대합실에 설치된 TV 앞에서 시민들이 한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다. 연합뉴스

쇼트트랙은 4년 전만 해도 나가면 무조건 금메달을 따야 하는 종목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번 대표팀은 금메달을 못딴 ‘죄’로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모태범(한체대)은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금메달을 딴 뒤 주종목인 1000m에서 은메달을 더했다. 아쉬운 탄식이 머문 것은 잠시뿐, 그는 트랙을 돌면서 기쁨의 춤을 췄고 웃고 또 웃었다.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도 외롭지 않았다. 4전5기에도 메달 획득에 실패한 이규혁(서울시청), 노메달로 조기귀국한 이강석(의정부시청), 본선 19위를 기록한 봅슬레이, 본선에도 못 나간 스키점프 곁에는 따뜻한 팬들의 격려가 있었다.

◇ 유치원생도 할아버지 할머니도 모두 김연아 팬 = 올림픽을 즐기는 데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다. 스포츠는 더 이상 남초 영역이 아니었다. 유치원생들이 오빠, 언니들의 레이스를 보고 꿈을 키웠다. 스포츠에 관심이 덜했던 여성들도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TV를 지켜봤다. 어린 시절 썰매와 대나무 스키를 타고 놀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잇단 메달 소식에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온국민이 ‘국민 여동생’ 김연아(고려대)가 빚어낸 완벽한 금빛 연기에 매료됐다.

박태환, 이용대, 야구대표팀이 금빛 소식을 전해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처럼 밴쿠버 올림픽에서도 온 국민이 팬이었고 서포터스였다. 선수와 팬들 사이의 벽도 많이 무너졌다. 선수들과 팬들이 개인 홈페이지와 블로그 등에서 서로 대화하며 직접 소통하는 방식이 새 트렌드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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