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88둥이 ‘내 꿈’을 향해 놀이처럼 승부한다

2010.03.02 01:37 입력 2010.03.02 09:51 수정

디지털화·세계화 경험…엄숙주의·압박감 훌훌

패배는 깨끗이 승복, 경쟁논리 내면화 ‘여유’

또래 “낯설지 않은 우리”‘취업경쟁’ 이면 지적도

1일 폐막한 2010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은 참신하고 유쾌했다. 젊은 국가대표 선수들은 습관처럼 ‘국민들 성원에…’를 말하지 않았고, 메달 색깔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전 세계 선수들과 어울린 자리에서도 주눅들지 않았다. 과거 올림픽이나 큰 대회 때마다 국가주의와 엄숙주의에 빠져 있던 시민들에게도 올림픽은 ‘세계인과 즐기는 축제’라는 새로운 생각을 심어줬다. 그 중심에는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태어난 신세대 ‘88둥이’들이 있다. “어른들은 올림픽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 듯 보지만, 우리는 원래 그래요”라고 말하는 그들이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은 과거와 달랐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유도 남자 100㎏급에서 장성호는 은메달을 따고도 눈물을 훔쳤지만 밴쿠버 동계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은 자신의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할 줄 알았다(맨왼쪽). 모태범은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금메달을 딴 뒤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춤을 췄고(왼쪽에서 두번째), 1만m 금메달리스트 이승훈은 시상식에서 댄서처럼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세번째).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의 곽윤기는 시상식에서 전 세계에 ‘시건방춤’을 선보였다. 경향신문 자료사진·밴쿠버 | 연합뉴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은 과거와 달랐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유도 남자 100㎏급에서 장성호는 은메달을 따고도 눈물을 훔쳤지만 밴쿠버 동계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은 자신의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할 줄 알았다(맨왼쪽). 모태범은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금메달을 딴 뒤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춤을 췄고(왼쪽에서 두번째), 1만m 금메달리스트 이승훈은 시상식에서 댄서처럼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세번째).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의 곽윤기는 시상식에서 전 세계에 ‘시건방춤’을 선보였다. 경향신문 자료사진·밴쿠버 | 연합뉴스

‘88둥이’는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태어난, 소위 시대적 중압감을 떨친 자유로운 세대다. 전문가들은 이들의 특징을 “경직된 기존 세대가 지닌 한계를 깨는 새로운 문화적 흐름”이라고 진단했다. 민족이나 국가가 아닌 ‘개인’의 성취와 즐거움을 누릴 만한 사회·경제적 조건이 성숙된 시대에 나타난 ‘자기표현 세대’라는 것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제성장에 따라 ‘생존 위주의 삶’에서 ‘표현 위주의 삶’으로 양식이 변화하게 된 것이 10년 전”이라며 “ ‘88둥이’들은 그 당시 어린 시절을 보내 자기 표현을 손쉽게 하는 첫 세대”라고 말했다.

2002년 월드컵 응원처럼 ‘놀이’에 대한 집단 경험도 이들에게 의미 있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장 교수는 “예전에는 집단으로 모여서 놀면 불온하단 인식이 있었는데 놀아도 문제없더라는 것을 경험한 유의미한 사건이었다”며 “이번 메달을 딴 선수들 역시 (중학생 때) 월드컵을 통해 이러한 재미를 경험한 세대”라고 말했다.

이들은 청소년기에 디지털화·세계화를 체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자기만의 방’에서 휴대폰·블로그 등 디지털기기와 인터넷에 길들여져 ‘자기 표현’에 익숙하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부 교수는 “형제가 적어 자기 방에서 혼자 자랐고, 거리에서 술래잡기 등을 경험하기보다 싸이월드 미니홈피 등을 성장기에 경험한 세대”라며 “이 때문에 거친 자기과시적 세리머니, 수상소감 등의 풍경은 이들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세계 무대로 진출한 스포츠 특급 스타들을 일찍이 접한 이들에겐 ‘서구 콤플렉스’도 먼 얘기다. 이들은 10대 시절 박찬호(야구)·박세리(골프)·박지성(축구)의 활약을 보며 자라 국제무대에 대한 두려움이 크지 않다. 이번 밴쿠버 메달의 주역들과 함께 해외에서 주목받는 신지애(골프)·박태환(수영)·이청용·기성용(축구) 등이 이렇게 자란 세대다.

경쟁의 논리를 체화·내면화시켜 경쟁을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난도 교수는 “온라인 게임 스타크래프트에 ‘GG(Good Game 혹은 Give the Game의 줄임말로, 보통 게임에서 패배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사용됨)’라는 표현이 있는데 경쟁에서 지면 깨끗하게 승복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이는 우리나라가 더욱 경쟁사회화된 IMF 외환위기라는 시대적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짚었다.

기성세대들의 호들갑과 달리 ‘88둥이’ 또래들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대학생 김보람씨(22)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자국 선수와 경쟁하다 메달 획득에 실패한 이호석 선수에 대한 비난이었다”며 “국가의 대표이기 이전에 개인의 경력이고 같은 나라 선수이지만 당연히 경쟁의식을 가져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호영씨(23)는 “쇼트트랙 시상식에서 곽윤기가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시건방춤’을 춘 데 대해 말이 많은데 친구들 사이에선 크게 화제가 되진 않았다”며 “자기가 원하는 걸 이뤘으니 개인의 성향에 따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낯설게 느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세대의 일면만 본 것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복학생 최재형씨(24)는 “더욱 세계화되고 자유로워진 사회에서 컸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우리 나름대로는 취업난도 심하고, 교육수준도 높아져 경쟁이 더 치열해지는 등 다른 부분에서 느끼는 중압감이 크다”고 말했다.

3수 끝에 올해 ‘10학번 여대생’이 된 김시언씨(20)도 “대학등록금이 없어 알바하는 친구들, 벌써부터 취업 경쟁에 뛰어든 친구들도 많아 앞날이 막막한데, 너무 올림픽 스타들만으로 우리를 보려는 것은 안일한 시각이 아닌가 싶다”며 “다만 이번 기회에 우리의 생각과 문화가 어느 정도 드러났다면 기성세대와 소통하는 계기가 됐음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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