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표현 ‘감별공식’ 있나요?···알아두면 쓸모있는 인권 상식

2018.01.12 16:19 입력 2018.01.12 22:48 수정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김승섭 교수(왼쪽)와 <말이 칼이 될 때>를 출간한 홍성수 교수가 서울 정동길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윤중 기자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김승섭 교수(왼쪽)와 <말이 칼이 될 때>를 출간한 홍성수 교수가 서울 정동길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윤중 기자

<말이 칼이 될 때>와 <아픔이 길이 되려면>. 최근 몇 개월 간격으로 출간된 두 권의 책 제목은 한국 사회의 좌표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43)의 <말이 칼이 될 때>는 여성혐오,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 이주민 차별 등 한국 사회의 뜨거운 이슈인 혐오표현에 대해 다룬다. 김승섭 고려대 대학원 보건과학과 교수(39)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삼성반도체 직업병 소송, 세월호 외상 스트레스 장애 등 사회적 상처들이 몸에 새긴 질병들의 데이터를 제시하고 공동체의 책임을 묻는다. “말이 칼이 될 때”도, “아픔이 길이 되기” 위해서도 중요한 건 인권 감수성에 기반을 둔 공동체의 역할이다. 논리를 설계하는 법학자, 데이터로 무장한 공중보건학자가 ‘인권과 공동체’라는 한길에서 만난 셈이다. 지난 8일 경향신문사를 찾은 홍성수·김승섭 교수에게 “알면 쓸데 있는 한국 사회의 인권과 공동체”에 대해 물었다.

■혐오할 자유도 표현의 자유 아닌가요.

홍성수(이하 홍) = 학자로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신념이 강한 편이에요. 그러나 혐오표현 연구를 하면서 말이 차별의 현실과 만날 때 어떤 폭발력을 가지는지 알게 됐죠. 2014년 서울시민인권헌장을 제정할 때 전 과정에 깊이 관여했어요. 인권, 차별 문제에 대해 시민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열린 마당이 되길 기대했죠. 그런데 동성애차별금지조항에 반대하는 반동성애 세력들이 조직적으로 공청회에 와서 노골적인 혐오표현을 내뱉었어요. 성소수자들은 그 말을 무방비 상태로 마주쳤습니다. 제가 마련한 자리나 다름없는데, 심한 자책이 들었어요. 그 상황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말은 꺼낼 수가 없었죠.

김승섭(이하 김) = 차별이나 혐오표현이 남긴 사회적 상처는 잘 지워지지 않아요. 이게 무서운 거죠. 예를 들어 한 흑인 환자가 백인 의사에게 인종차별을 경험했어요. 이후에 흑인 환자는 새로운 병원에 갈 때마다 겁이 나요. 한 번 경험했으니 백인 의사로부터 또 차별당하지 않을까 두려운 거예요. 아플 때마다 그것부터 걱정이 되는 거죠. 자신을 혐오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소수자들의 스트레스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공포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홍 = 표현의 자유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지만 그 범위가 무한정일 수는 없어요. 혐오표현이 난무하면 소수자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거든요. 예컨대 김치녀, 김여사, 개념녀 같은 여성혐오 표현들이 회사에서 일상적으로 오가는 상황에 하나하나 문제제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이런 상황에서 소수자들은 입을 다물게 돼요. 혐오표현으로 인해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이죠. 강자들이 내뱉는 혐오표현 일부를 제한해야 소수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거든요. 그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사회의 임무고요.

■ 차별이 몸을 아프게 한다고요.

김 =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당했을 때와 물리적 폭력을 당했을 때 뇌에서 피가 몰리는 부분이 같다는 연구가 있어요. 예를 들어 무방비 상태에서 어떤 사람이 밀림에서 사자를 만났다고 해봐요. 사자를 보는 순간 인간의 몸은 변해요. 심장이 빨리 뛰죠. 식욕, 성욕도 작동하지 않아요. 위기에서 탈출하기 좋은 몸으로 변하는 거죠. 이를 스트레스 반응이라고 해요. 위기상황이 끝나면 원상태로 회복되고요. 생존할 가능성을 높인다는 면에서 좋은 반응이에요. 그런데 만약 사자가 다음날도 있고 또 다음날도 있다면요. 스트레스 반응이 정상화될 겨를 없이 계속되겠죠. 잘못한 바가 없는데 나를 해치려는 사람들이 곳곳에 존재하고 세상은 나에게 적대적이에요. 그 긴장을 견디는 몸은 온전할 수 없죠. 때로는 심장병으로, 때로는 고혈압으로, 때로는 우울증으로 나타나요.

홍 = 의학적으로 실증할 수는 없지만 그런 일을 겪어요. 성소수자 친구가 혐오표현이 가득 담긴 피켓을 보고 얼굴이 사색이 된다거나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대는 걸 보면 이게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는 차원을 넘어 엄청난 물리적인 충격을 준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이런 해악이 분명한데 사회가 방치하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느냐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고요.

김 = 몸은 정직해요. 하버드보건대학원의 낸시 크리거 교수는 차별을 경험하는 것, 그 경험을 차별이라고 인지하는 것, 그 인지한 차별을 보고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해요. 사회적 약자들이 차별을 경험했을 때 그 경험을 차별이라기보다 자신이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게 심리적으로 불편함이 덜하기 때문이거든요. 제가 2012년 다문화가족 실태조사를 분석한 논문이 있어요. 그중 다문화가정 청소년들의 학교폭력 경험과 우울증상의 연관관계를 조사했는데요. 남학생들 중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다’고 답변한 학생들이 우울증상 유병률이 가장 높았어요. 소수자들은 실제로는 되게 아픈 건데 이 상황을 벗어날 가능성들이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다 보니 스스로 무력감에 빠지는 경우가 많아요. 아픈데 그 무력감 속에서 스스로를 버티게 하는 말을 찾는 거죠.

■ 미국은 수정헌법 1조에서 ‘표현의 자유’를 엄격하게 보장하는데요.

김 = 미국적 맥락에서 표현의 자유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차별은 미국에서 뜨거운 단어예요. 예컨대 ‘HIV/AIDS 환자에 대한 차별’이라는 말은 한국에서는 단어 자체가 낯설잖아요. 미국은 그렇지 않아요. 미국 프린스턴대학은 한국 정부가 운영하는 ‘외국인 장학 프로그램’의 홍보물을 대학 홈페이지에서 내리게 했어요. 장학금 지원대상에서 법정전염병 환자는 제외됐는데, 그게 HIV/AIDS 환자에 대한 차별이라는 이유에서였죠.

홍 = 혐오표현금지법이 없다고 미국이 혐오표현에 손을 놓고 있진 않아요. 실제로 미국에서는 혐오표현을 제한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적 기제들이 작동하고 있어요. 상당수의 미국 대학과 기업들은 ‘차별금지 정책’ ‘다양성 정책’을 수립했어요. 애플, 스타벅스, 마이크로소프트, 디즈니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기업들은 친동성애 정책(LGBT Friendly Policies)을 내세우기도 하고요. 세계 각국의 미국대사관에는 동성애 직원 모임이 있고 주한 미국대사관은 공식적으로 한국의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했어요. 또 정치인들은 수시로 나서서 인종차별이나 성소수자 차별 문제에 대해 분명한 반대 입장을 밝히고요. 미국은 혐오표현 규제 방법 중 형사 규제를 제외한 거의 모든 규제를 시행하고 있는 셈이죠. 그것도 아주 강력한 방식으로요.

■ 지난 대선 토론 과정에서 ‘동성애에 반대하지만, 동성애자가 차별받아선 안된다’는 말이 나왔는데요.

홍 =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고, 표현 수위와 관계없이 차별을 재생산하고 공고히 할 수 있는 말이에요. 지난 대선 때 TV토론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동성애에 반대합니까?’를 물었잖아요. 당시 문재인 후보는 ‘그럼요’라고 말했고요. 소수자를 향해 한국 사회가 그들의 편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은 굉장히 경계해야 해요. 특히 유력 정치인이 그런 발언을 하면 그 의도와 상관없이 ‘이 사회에서는 소수자를 배제하는 말을 해도 되는구나’라는 사회적 인식을 낳죠. 소수자 집단을 차별하고 고립시켜 정치적 지지를 모으는 것은 오래된 정치적 수법입니다. 그 원형이 나치죠. 현대에서는 이주노동자나 성소수자가 표적이 되고요. 지난 대선에서 홍준표 후보가 동성애를 표적으로 삼은 건 그런 정치인들이 등장하게 된 신호탄이었다고 봐요. 어떤 정당이 어떤 긍정적인 지향점을 제시하며 지지세력을 규합하기는 쉽지 않죠. 반면 소수자를 고립시키는 발언으로 지지세력을 끌어모으기 쉽다고 판단한 거죠. 옛날에는 지역감정이었다면 이제 소수자 집단을 혐오하는 것으로 바뀐 거죠.

김 = 당시 성소수자 존재를 두고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기술’을 걸었던 홍준표 후보에게 너무 화가 났는데요. 성소수자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이용한 거잖아요. 과학적으로도 맞지 않죠.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에요. 학술적으로 정리가 끝났어요. 끝난 질문을 놓고 싸우는 건 우리를 후퇴시키는, 해결된 질문을 다시 가져오는,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일일 뿐이에요. 예컨대 한국 사회에서 남성 동성애자들의 HIV 감염 유병률이 높아요. 특정 질병의 발생을 줄이려면 질병의 위험요인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사회적으로 개입해야 하죠. 위험요인 중에는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게 있어요. 동성애라는 성적 지향은 개입해서 바꿀 수 있는 위험요인이 아니에요. 연령, 성별, 거주지역처럼 사회인구학적 정보에 해당해요. 강원도에 사는 산모들의 모성사망률이 서울보다 3배 정도 높은데, 대책이 강원도 산모를 서울로 이사시키는 건가요? 강원도에 있는 산부인과의 의료접근성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로 가야죠. 남성 동성애자들의 HIV 감염률이 높다고 할 때, 동성애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동성애자를 이성애자로 바꾸겠다는 비과학적이고 폭력적인 주장을 전문가들 누구도 하지 않아요. 그게 아니라 남성 동성애자들을 HIV 감염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고 이미 걸린 사람들을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할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한 거죠.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김승섭 교수(왼쪽)와 <말이 칼이 될 때>를 출간한 홍성수 교수가 서울 정동길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윤중 기자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김승섭 교수(왼쪽)와 <말이 칼이 될 때>를 출간한 홍성수 교수가 서울 정동길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윤중 기자

■ 차별 혹은 혐오표현에 법으로 금지하고, 어길 시 처벌하면 될까요.

홍 = 차별이나 혐오표현의 핵심은 결국엔 소수자 집단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만들어서 사회에서 배제시키고 그 나머지가 그에 따른 이익을 얻는 거거든요. 여기에 저항하는 운동은 그것과 거꾸로 가야 해요. 고립 대상이 차별받는 소수자가 아니라 오히려 차별하고 혐오표현을 말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거죠. 그게 반차별운동, 반혐오표현 운동의 핵심이라고 봐요.

김 = ‘공략하기보다 낙후시키라’는 말이 있어요. 저는 그 말이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누가 소수자 집단에 대한 혐오를 말했을 때 ‘어디 나가서 그런 소리 하면 안된다’는 식으로 부끄러워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거 같아요. 한마디로 소수자 집단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후진 걸로 만드는 거죠.

홍 = 혐오표현이 금지되면 사회의 담론이 합법 표현·불법 표현으로 이분화돼 그동안 도덕·비도덕, 사회적·반사회적 등 다양한 가치 판단에 의해 논의되던 것들이 합법·불법이라는 논점으로 급격히 빨려 들어갈 수 있어요. 혐오표현 금지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금지보다는 되도록 표현의 자유를 증진하는 방향의 개입을 우선해야 한다고 봐요. 더 많은 표현과 더 좋은 사상으로 맞서는 것이 최고의 복수라는 거죠. ‘형성적 규제’가 중요하다고 보는 이유죠. 형성적 규제는 범국가적 차원에서 반차별 정책을 시행하고, 교육과 홍보를 통해 인식을 제고하고, 소수자 집단에 대한 각종 지원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이에요. 이러한 형성적 규제는 궁극적으로 혐오표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시민사회 역량을 강화하는 역할도 해요.

김 = 혐오표현 자체를 줄이기 위한 규제도 물론 필요하지만, 혐오표현은 진공 속에서 나온 게 아니잖아요. 권력관계라는 사회적 기반에서 나왔기 때문에 표현 자체를 줄이기 위한 노력과 함께 여성,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등을 소외시키는 사회적 토대를 바꾸기 위한 노력도 함께 진행해야 해요. 제가 공부하는 사회역학에는 ‘원인의 원인’(causes of causes)이라는 표현이 있어요. 사람들은 질병의 원인으로 유전자, 흡연, 음주와 같은 개인적 수준의 요인만을 생각하는데, 모든 인간의 몸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환경에 놓여 있고 그러한 ‘원인의 원인’으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있어요. 매일 생명을 위협받는 위험한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금연에 실패할 경우, 그 원인은 개인의 금연 의지 부족일까요, 아니면 금연 의지를 좌절시키는 위험한 작업환경일까요. 둘 모두겠지요. 하지만 전자는 개인의 역할이고 후자는 작업장과 회사·국가의 책임인데 한국 사회는 전자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은지도 생각해봐야 해요.

<말이 칼이 될 때>를 출간한 홍성수 교수가 책<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김승섭 교수와 대담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말이 칼이 될 때>를 출간한 홍성수 교수가 책<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김승섭 교수와 대담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 혐오표현 감별공식은 없나요.

김 = 미국에서 공부할 때 흑인들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 말이 저에게 실제로 위협으로 느껴졌어요. 제가 그 나라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한국에서 누군가가 제게 ‘너희 집으로 가’ 했다면 위협으로 느끼지 않을 거 같아요. 같은 표현이라도 역사적 맥락, 사회적 조건에 따라 혐오표현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게 중요한 지점인 것 같아요.

홍 = 혐오표현에 대해 대중 강연을 하다 보면 ‘남혐’ ‘개독’도 혐오표현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핵심은 그 표현이 차별을 재생산하고 있는지 여부예요. 소수자들처럼 차별받아온 과거와 차별받고 있는 현재와 차별받을 가능성이 있는 미래라는 맥락이죠. 비장애인에게 ‘장애가 없는 사람들은 집에 있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비장애인에게 위협이 되거나 차별을 조장하진 않잖아요. 하지만 장애인에게 ‘집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다면 그 사회적 효과와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죠. 이건 혐오표현이고 저건 혐오표현이 아니라는 식의 감별보다는, 같은 말이라도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이해하는 게 중요해요. 똑같은 표현에 대해서도 판단이 다를 수 있어요. 무엇보다 혐오표현과 차별에 대한 우리 공통의 감각을 키워가는 게 중요다고 봐요.

■ 차별에 대한 한국 사회의 감수성은.

김 = 다른 사회에 비해 차별에 대한 한국 사회의 감수성이 낮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이에 대한 일상적인 교육이 없었던 건 맞아요. 그래서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대한 감수성을 스스로 잘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은 늘 해야 해요. 시간이 걸리고 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어요.

홍 = 여성혐오 논란이 있었던 영화 <VIP>의 박훈정 감독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어요. 감독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연출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여혐 의도가 없었다고 우기기보다는 본인이 젠더 감수성이 부족하고 무지했다고 인정을 하시더라고요, 그 감독은 최소한 다음 작품에서 여성이 영화에서 어떻게 비쳐지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실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소위 ‘여혐 논란’은 충분히 가치 있는 문제제기가 아니었을까요. 영화 <청년경찰>을 계기로 한국 영화가 중국동포나 조선족들을 늘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린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도 마찬가지에요. 이러한 문제제기가 주는 효과는 커요. 상영금지의 문제를 넘어 한국 사회가 소수자를 다뤄온 방식이 너무 편의적이었던 게 아닌지 돌아보게 되는 거죠. 실제로 그런 자성들이 영화계 내부에서 나오고 있고요.

김 = 감수성은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문제이고 경험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잖아요. 인종차별 감수성에 대한 실험이 있는데요. 1968년에 미국에서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살해됐어요. 백인만 거주하는 아이오와주 작은 시골마을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학생들에게 이를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했어요. 그 교사는 학생들에게 멜라닌 색소가 많을수록 똑똑하다고 하면서 갈색 눈을 가진 사람이 멜라닌이 더 많아 똑똑하다고 해요. 그러면서 갈색 눈을 가진 아이들에게 특권을 부여하죠. 파란 눈의 아이들은 주눅이 들고 갈색 눈의 아이들은 이들을 무시했죠. 인종차별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준 실험이었어요. 일주일 후 교사는 아이들에게 우월한 유전자는 갈색 눈이 아니라 파란 눈이었다며 특권을 역전시켜요. 그때 신기한 현상이 나타나죠. 피해자의 경험을 가진 파란 눈의 아이들은 ‘우월한’ 집단이 되어서도 ‘열등한’ 갈색 눈의 아이들에게 훨씬 너그러웠어요.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에 대해 더욱 조심할 줄 알았던 거죠.

■ 공동체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김 = 연결될수록 건강해진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규명이 되고 있어요. 나를 지지해주는 사회적 관계가 많을수록 감기 나 심장병은 물론이고 사망위험도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들이 쌓이면서 사회적 관계망과 건강에 대한 가설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게 된 것이에요. 1960년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이탈리아 이민자가 모여 있는 로세토 마을은 심장병 사망률이 눈에 띄게 낮았습니다. 인근의 비슷한 조건의 이탈리아 이민자 마을의 절반 수준이었죠. 30여년간의 연구 끝에 로세토 마을의 건강 비결은 공동체 덕분이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사회적 결속, 사회적 지지가 인간의 몸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죠. 개인이 맞닥뜨린 위기에 함께 대응하는 공동체, 타인의 슬픔에 깊게 공감하고 행동하는 공동체의 힘은 중요하죠.

홍 = 2016년에 서울대 성소수자 동아리 QIS가 정문 근처에 ‘관악에 오신 성소수자, 비성소수자 신입생 여러분, 모두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붙였어요. 일주일 후 이 현수막은 찢겨졌죠. 누군가 일부러 훼손한 게 분명했어요. 성소수자 학생들이 상처를 입었을 거예요. 자신이 물리적으로 공격당하는 느낌을 받았을 수 있고 학내 구성원 중 누군가가 자신을 혐오하고 심지어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에 휩싸였을 거예요. 동아리 학생들은 현수막을 다시 제작하는 대신 연대를 호소했어요. 중앙도서관 앞에 찢어진 현수막을 걸어놓고 반창고로 붙여달라고 했죠. 학생들이 지지와 연대의 의사를 표명했고 현수막은 복원됐어요. 누군가 성소수자를 배제하려고 했지만, 대항표현으로 새로운 연대를 만들어낸 거죠. 찢은 사람을 처벌하는 것 못지않게 구성원들이 함께 연대해 혐오표현에 대항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 = 저는 현재의 과학적 근거에 기반을 둔 전선이 어딘지에 대한 고민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고민이 없으면 그저 우리끼리 소통하고 동의하는 수준에서 끝나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문제를 연구했어요. 이 사건을 바라보는 좋은 프레임은 뭘까를 고민해요. 친노동자적 프레임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한국 사회에서 다음 단계로 조금이라도 나아가기 위해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를 두고 저는 두 가지 질문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런 해고를 합법이라고 해도 좋은가? 해고 노동자들을 국가는 어떻게 대했나? 이 질문에 대해 잘 답하면 더 나은 사회로 갈 수 있다고 봐요. 저는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본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함께 살 수 있는 전선을 늘 찾는 거죠.

▶사회적 약자의 ‘아픔’ 데이터화…“제도 바꿀 무기 준비”

김승섭 교수의 연구실은 지금

소방관·성소수자·하청노동자 등 왜 아픈지 모르는 사람들 위해 구조적 원인을 찾아 통계 만들어

성소수자의 사회적 경험과 건강 연구, 백화점·마트에서 일하는 하청노동자들의 건강 연구, 콜센터 노동자들의 골격계 질환에 대한 연구, 소방공무원들의 노동환경과 우울증 유병률과의 관계 등…. 김승섭 고려대 대학원 보건관리학과 교수의 연구실에서 진행되고 있거나 준비 중인 연구들이다.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와 같은 성소수자와 열악한 근무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에 대한 연구를 양대 축으로 소외나 차별 없이 한국사회가 함께 건강하게 살아갈 방법을 모색 중이다.

김 교수의 연구실에는 총 9명의 학생들이 있다. 이들의 관심사나 연구 주제는 제각각이지만 단순히 의학의 발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동일하다. 박사과정의 성효주씨(31)는 “물리치료학을 전공했고 병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했지만 의료환경에 한계를 느끼면서 정책에 관심을 두게 됐다”며 “많은 사람들이 아프지만, 왜 아픈지 모른다. 그 구조적 원인을 찾는 보람이 있다”고 말했다. 박사과정에 있는 김지환씨(27)는 연구실의 작업을 “무기를 쌓아놓는 것”에 비유했다.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적 원인으로 아프거나 다쳐도 그에 대한 최소한의 통계적 수치도 마련돼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피해자의 증언이나 기자회견은 있어도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 보여줄 수 있는 데이터, 무기가 충분치 않았던 거죠.” ‘무기를 만드는 작업’은 고통의 구조적 원인을 정교하게 추적한다. “소방공무원들이 시민들에게 폭행당한 경우가 많고 그래서 우울증 유병률도 높죠. 여기서 중요한 건 이때 조직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유병률이 달라진다는 거죠. 소방공무원들이 피해를 입었어도 어디에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일 때 유병률이 높아져요.” 이러한 연구결과는 소방공무원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을 지원하는 정책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한국사회 소수자 집단이나 열악한 근무환경에 처해 있는 노동자들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져 있을 것이라고는 누구나 막연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가 ‘아플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과 이를 구체적인 숫자로 실증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과학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한 데이터가 수반될 때 그 힘은 제도 변화로까지 이어진다. 예컨대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지난 50여년간 성소수자의 건강과 삶에 대해 많은 연구가 축적돼 왔다. 연구의 힘은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약화시켰고 동성결혼 법제화 등의 제도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는 2013년에 시작해 올해로 6년째로 접어든 김승섭 교수 연구실이 위험한 환경에 노출된 사회적 약자의 건강을 연구하며 ‘무기를 쌓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홍성수 교수가 정의하는 혐오표현과 대응법

·혐오표현

혐오표현에서 ‘혐오’란 그냥 감정적으로 싫은 것을 넘어서 어떤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차별하고 배제하는 태도. 혐오표현은 소수자에 대한 편견 또는 차별을 확산시키거나 조장하는 행위 또는 어떤 개인, 집단에 대해 그들이 소수자들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모욕·위협하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 적의,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

·혐오피라미드

[커버스토리 - 알·쓸·人·잡]혐오표현 ‘감별공식’ 있나요?···알아두면 쓸모있는 인권 상식


편견, 혐오표현, 차별, 증오범죄 등을 하나의 맥락으로 본다. 편견의 발현이 표현인지 폭력인지로 갈릴 뿐, 그 원인과 배경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된장녀’라는 혐오표현도 된장녀 신상털기, 데이트 폭력, 성폭력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 혐오표현 대응법

-의도하지 않은 발언이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자. 혐오표현 여부를 판단하는 데 있어 말한 사람의 의도가 아닌, 소수자 당사자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 소수자의 관점에서 발언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고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성찰하지 않으면 문제를 파악할 수 없다. 최근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성희롱 논란과 관련해 “24년 정치활동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성희롱 발언을 한 일도 성희롱으로 구설수에 오른 일도 없다”고 해명한 직후 “성희롱을 할 만한 사람한테 해야지”라는 성희롱 발언을 해 비난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혐오표현에 대한 공동대응으로 혐오표현을 예방해보자. 혐오표현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가 그 즉시 발언에 대해 정정을 요청하고 사과를 받는 게 제일 좋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적 대응이 쉬운 일은 아니다. 현장에 있는 제3자가 함께 공동으로 문제를 제기하거나 조직 내 분쟁해결기구 등을 이용하도록 하자. 조직 내에서 문제를 제기해야 혐오표현에 대한 사례를 남겨 예방대책에도 활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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