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러링 잡지 ‘사심’을 아시나요

여성들의 반격 미러링, 오프라인으로 나오다

2015.12.11 21:16 입력 2015.12.12 10:20 수정

여성 혐오를 혐오하노라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인식과온라인 중심으로 퍼져온 남성들의 여성 혐오가 얼마나 터무니없고 폭력적인지를 거울처럼 반사해 비춰준다.“내가 김치녀라고? 그럼 당신은 김치남!” 남성들에 대한 되갚아주기이기도 하다.

타깃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다. “남성을 고쳐 쓰느니 여성들을 정신차리게 하는 게 빠르다”고 말한다. 페미니즘 저널 ‘이프’ 이후 ‘사심’까지 약 10년이 걸렸다.

어두운 초록빛이 감도는 배경. 자동차 트렁크에 탄 여성이 남성잡지 ‘맥심’을 찢으며 웃고 있다. 그녀가 찢은 건 지난 8월 ‘여성 납치’ ‘트렁크 시체 유기’를 연상시키는 장면으로 물의를 빚었던 ‘맥심’ 9월호다. 남성잡지를 거침없이 찢고 구겨버리는 이 여성은 잡지 ‘사심(forsim·4心)’의 창간호(10월호) 표지 모델이다.

[ 미러링 잡지 ‘사심’을 아시나요 ]여성들의 반격 미러링, 오프라인으로 나오다

■ 여성 위한 ‘미러링 잡지’ 탄생

‘사심’은 지난 10월 ‘여성들을 위한 여성의 잡지’를 모토로 창간됐다. ‘사심’은 ‘여자들의 사적인 마음’ ‘여성들의 마음을 위하여’ 등을 뜻한다. 겉표지부터 도발적인 이 ‘여성들을 위한 잡지’는 ‘속’도 독특하다. 보통의 여성지, 여성패션지가 싣는 화장품이나 의류 광고가 전혀 없다. 아름답고 우아한 여성 모델이 ‘나처럼 예쁘고 날씬해지고 싶지?’ 하며 유혹하는 듯한 화보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사심’에는 섹시한 서양 남성 모델이 여러 명 등장한다. 탄탄한 근육을 아낌없이 드러낸 누드 혹은 세미누드 화보다. 여성 모델은 하나같이 ‘세 보이는’ 화장을 한 채 담배를 피우고 있다.

현재 주문 접수를 받고 있는 ‘사심’ 2호.

현재 주문 접수를 받고 있는 ‘사심’ 2호.

이 특이한 잡지는 대체 뭘까. 편집장 ‘미스터신’은 지난 9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심’은 미러링 잡지”라고 말했다. ‘미러링(mirroring)’은 ‘거울(mirror)처럼 반사해서 보여준다’는 뜻으로, 2015년 여름쯤부터 ‘남성들의 여성 혐오가 얼마나 터무니없고 폭력적인지 비춰준다’는 취지로 온라인에서 쓰이기 시작한 단어다. 거울이 좌우를 바꾸어 보여주듯, ‘미러링’은 성별의 배치를 뒤집어 보여준다. 예컨대 “연애할 때는 섹시한 여자가 좋지만 결혼할 때는 아무래도 깨끗한 처녀를 찾게 되는 것이 솔직한 늑대의 심정 아니겠습니까”라는 ‘원본’을 ‘미러링’하면 “순수하고 조신한 연하 총각을 바라는 것이 솔직한 여우의 심정이지요. 남자는 그저 문란하지 않고 정숙한 것이 최고 아니겠습니까”가 된다. 미러링은 원본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차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가 보여주는 ‘비틀기’ 장치다.

온라인 중심이던 ‘미러링’을 굳이 오프라인 잡지로 보여주려는 이유는 뭘까. ‘결정타’는 역시나 ‘맥심’이었다. 미스터신은 “지난 8월 맥심 표지가 한창 논란을 일으킬 당시, ‘이 정도는 유머로 넘어갈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남성들을 접했다. 약자에 대한 폭력을 유머로 취급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 그러면 나도 똑같이 보여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심’을 기획한 계기”라고 말했다. ‘사심’에 실린 화보 곳곳에서 ‘맥심’은 하이힐 굽에 밟히거나 불태워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 ‘열정 페이’에도 수십명 자원

그러나 ‘맥심’ 논란은 일종의 ‘티핑포인트’였을 뿐, 사실 “한국 사회에 깔린 가부장적 인식과 지난 십수년간 온라인 중심으로 퍼져온 여성혐오가 ‘사심’의 탄생 배경”이라고 미스터신은 말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김여사’부터 시작해 2000년대부터 등장한 ‘된장녀’ ‘개똥녀’ ‘취집녀’ ‘무개념녀’ ‘오크녀’ ‘개념녀’ ‘김치녀’ ‘맘충’ 등 셀 수 없이 넘쳐나는 여성혐오에 시달리다 못한 여성들이 온라인에서 ‘미러링’으로 반격하기 시작했고, 끝내는 ‘사심’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심’ 창간호에 실린 그래픽과 지면들.

‘사심’ 창간호에 실린 그래픽과 지면들.

반격의 선봉에 설 ‘금손(손재주가 있다는 뜻의 신조어) 능력자’를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지난 9월쯤, “솔직한 여성들의 잡지를 함께 만들고 싶은 분들을 열정페이로 모신다”는 모집 글이 ‘사심’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라가자마자 에디터,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 수십명이 기다렸다는 듯 자원했다. 편집장 미스터신을 포함한 14명의 편집진이 곧장 꾸려졌다.

‘사심’은 미러링의 일환으로 섹시한 남성의 누드 화보를 내걸었다. 기존 남성 잡지에서 헐벗은 여성의 육체를 남성의 욕망과 시선으로 그려왔던 것이 원본이라면, ‘사심’은 ‘성적 주체’와 ‘성적 대상’의 성별을 미러링해 여성이 ‘성적 대상으로 보는’ 남성의 육체를 표현했다.

‘사심’ 창간호에 실린 그래픽과 지면들.

‘사심’ 창간호에 실린 그래픽과 지면들.

기존의 여성혐오적 언어를 되갚아주기도 한다. 창간호에 실린 ‘내가 김치녀라고?’라는 제목의 기고글은 ‘~녀’ 등 여성만을 향해 붙여진 수많은 ‘낙인’들을 언급하며 “남성에게도 이름을 붙여보자. 아이 엄마를 두고 ‘맘충’이라고 부르는 남자야말로 미래의 ‘애비충’”이라고 지적한다. ‘김치녀’ 운운하는 남성은 자동으로 ‘김치남’이 된다. 가상의 고민글에선 ‘33살 전업주부 남성’이 화자로 등장해 “명절에 전 부치는 대로 쏙쏙 골라 집어먹는 얄미운 처남, 아무 말 없는 와이프”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는다. 이 역시 ‘여성의 명절 노동’을 미러링한 것이다.

‘사심’은 여성들이 ‘코르셋’처럼 차고 있는 외모 꾸미기에 대한 강박과 남성의 시선으로 자신을 검열하는 습관도 한번쯤 되짚어볼 것을 제안한다. “내가 제모를 하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여자이다” “행복은 날씬한 몸매에서 나오는 줄로만 알았어요. 하지만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남들의 시선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다이어트를 하고, 화장을 하고, 성형수술을 받았어요. 그 시간 동안 나는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았어요”라는 메시지가 적힌 일러스트가 그 예다.

‘사심’ 창간호에 실린 그래픽과 지면들.

‘사심’ 창간호에 실린 그래픽과 지면들.

미러링과 발상의 전환을 통해 그동안 차별받아왔던 여성의 목소리를 잡지의 전면에 담아낸다. 성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책 <이기적 섹스>를 추천하며 성인용품 고르는 법을 알려주는 등 ‘여성의 욕망을 대변한다’는 본분에도 충실하다. 미스터신은 “‘코스모폴리탄’이나 ‘쎄씨’ 같은 잡지는 사실 ‘여자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가 아니라 ‘남자들이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를 담아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성욕이나 성차별 등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예쁘게’ 말하려고 노력하거나 조용히 있어야만 했던 수많은 주제들을 전하고 싶었다. ‘너도 이런 이야길 해도 돼’ ‘너도 목소리가 있어’라는 지지의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양성평등 그날까지

‘사심’의 타깃은 남성이 아닌 여성 독자이다. 미스터신은 “페미니즘에 관심은 있지만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여성들도, ‘미러링’을 통해서라면 성차별과 여성혐오에 대한 문제의식에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심’이 남성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성들을 고쳐 쓰느니 여성들을 정신 차리게 하는 것이 빠르다”고 했다.

‘사심’은 미러링을 활용하되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단순한 말장난에 그칠 수 있는 미러링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페미니즘의 문제의식과 지식도 담으려고 한다. ‘여성 위인 사전’ 코너에서는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박에스더를 소개하며, 페미니즘 도서를 추천하기도 한다. ‘사심’은 현재 출간되고 있는 여성주의 저널 ‘일다’나 ‘여성신문’이 가지는 관점과 문제의식을 일부 공유하면서 미러링을 도입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사심’ 창간호에 실린 사진. 한 여성이 남성잡지 ‘맥심’의 표지를 구기고 있다.

‘사심’ 창간호에 실린 사진. 한 여성이 남성잡지 ‘맥심’의 표지를 구기고 있다.

독자들은 ‘사심’에 뜨겁게 반응했다. 지난 10월 온라인으로만 주문 접수를 받아 11월에 배포된 창간호(10월호)는 편집진의 예상을 넘어 1000부를 찍었다. 선주문으로만 700부 이상이 나갔고, 현재까지도 재고를 구하려는 문의가 이어진다. 최근 주문 접수를 받기 시작한 12월호는 가격을 기존 1만원에서 1만2000원으로 올려 일단 1000부를 찍을 계획이다. 일반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1000부 이상 팔리기 어려운 출판 시장을 고려하면 꽤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돌발적이고 즉흥적으로 탄생한 잡지 ‘사심’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미스터신은 “예능 프로그램부터 온라인 게시물, 심지어는 ‘선녀와 나무꾼’ 같은 전래동화에까지 여성 혐오 코드가 차고 넘친다. 미러링 콘텐츠가 떨어질 염려는 전혀 없다”고 단언했다. 다만 남성들이 가하는 조롱과 인신공격은 우려스럽다. ‘사심’ 창간호 표지모델은 소위 ‘신상털이’가 두려워 얼굴 전체가 화보에 드러나는 것을 꺼렸다. 결국 그는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살짝 가리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편집장을 비롯한 편집진들도 괜한 비방을 피하기 위해 필명으로만 활동한다. 2호 표지모델은 “(인신공격을 받게 될 경우) 고소할 것을 각오하고” 얼굴을 공개했다고 한다.

수익성이 낮다는 점도 ‘사심’이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다. 현재 ‘사심’의 일러스트레이터, 에디터 등은 각자 현업에 종사하면서 짬짬이 ‘사심’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1000부 넘게 찍어도 판매금액에서 비용을 제하고 남는 건 약간의 수당과 한끼 밥값 정도다. 아직 국제표준도서번호(ISBN)를 발급받지 않아, 일반 서점이 아닌 ‘사심’ 홈페이지를 통해서만 구입할 수 있다는 점도 한계다. 정기 간행물이나 정식 잡지로 인정할 만큼의 ‘퀄리티’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미스터신은 “아직은 수익성을 논할 상황이 아니다. 일단 두 달에 한번씩 내는 격월간지로 자리 잡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는 잡지가 자리 잡고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일까. 미스터신은 “한국에선 일반 사람들이 페미니즘이 뭔지 알기도 전에 ‘꼴페미(꼴통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부터 자리 잡았다. 성평등이라는 지향에 대한 거부감마저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6년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가 종간되고부터 ‘사심’이 나올 때까지 약 10년이 걸렸다. 지금 ‘사심’이 밀리면 다시는 이런 잡지가 나오지 못할까 불안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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