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국가' 아일랜드, 낙태 합법화 된다

2018.05.27 20:30 입력 2018.05.27 20:47 수정

“오늘은 아일랜드의 역사적인 날입니다. 조용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리오 버라드커 총리는 26일(현지시간) 아일랜드 더블린성 앞에서 낙태금지 헌법 조항 폐지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를 발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전날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폐지 찬성이 66.4%로 반대(33.6%)를 압도했다. 투표율은 64.1%였다. 전 국민의 84%(2018년 유엔 통계)가 가톨릭 신자인 아일랜드에서 낙태가 폭넓게 허용된 것이다.

낙태 합법화를 지지하는 아일랜드 시민들이 26일(현지시간) 더블린성 앞에서 국민투표를 통해‘낙태 금지 헌법 조항 폐지’가 결정되자 손을 들며 환호하고 있다. 더블린|AP연합뉴

낙태 합법화를 지지하는 아일랜드 시민들이 26일(현지시간) 더블린성 앞에서 국민투표를 통해‘낙태 금지 헌법 조항 폐지’가 결정되자 손을 들며 환호하고 있다. 더블린|AP연합뉴

국민투표에 부쳐진 것은 수정헌법 8조다. 1983년 채택된 이 조항은 “산모와 태아의 생명권이 동등하다”고 규정해 거의 예외 없이 낙태를 금지해왔다. 여성의 생명이 위험한 때에만 제한적으로 중절 수술이 허용되고, 불법으로 수술을 받는 사람은 최대 14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산모 생명이 위협받는 경우를 판단하는 기준 또한 모호해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일랜드 여성들은 중절 수술을 받기 위해 임신 24주까지 수술을 허용하고 있는 영국 등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1983년 이후 해외에서 수술을 받은 아일랜드인은 약 17만 명에 이른다. 온라인을 통해 불법낙태약을 구입하는 사람의 수도 매년 2000명에 달했다.

아일랜드의 낙태금지법을 두고 유엔 인권위원회는 ‘잔혹하고 비인간적이며 굴욕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던 2012년 복통을 호소하며 중절 수술을 요구한 사비타 할라파나바르(당시 31세)가 태아의 심장박동이 들린다는 이유로 거절당해 결국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낙태 허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지난 3월 낙태 금지 조항 폐지를 묻는 국민투표가 결정됐다.

[관련기사]▶아일랜드 정부 "낙태금지 헌법 폐지, 5월 국민투표에서 묻겠다"

낙태합법화를 지지하는 아일랜드 시민들이 낙태 금지 조항 폐지가 결정된 26일(현지시간) 더블린의 사비타 할라파나바르 벽화 앞에 모여있다. 사비타 할라파나바르는 2012년 임신중 심한 복통을 호소, 임신 중절 수술을 요구했지만 태아 심장소리가 들린다는 이유로 거절당해 결국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더블린|AP연합뉴스

낙태합법화를 지지하는 아일랜드 시민들이 낙태 금지 조항 폐지가 결정된 26일(현지시간) 더블린의 사비타 할라파나바르 벽화 앞에 모여있다. 사비타 할라파나바르는 2012년 임신중 심한 복통을 호소, 임신 중절 수술을 요구했지만 태아 심장소리가 들린다는 이유로 거절당해 결국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더블린|AP연합뉴스

국민투표가 결정된 이후 낙태금지법 찬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투표 직전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아일랜드인 수천명이 임시 귀국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우편투표가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탓에 직접 투표를 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서는 투표 독려 운동 ‘투표를 위해 집으로(#HomeToVote)’이 일어났다.

이날 더블린성 앞에서 국민투표 결과를 받아든 낙태합법화 지지자 5000여명은 환호했다. 낙태금지법 폐지 캠페인 ‘예스’의 공동대표 올라 오코너는 “오늘은 아일랜드 여성에게 기념비적인 날”이라며 “이 결과는 여성을 2등 시민으로 대우하는 것에 대한 아일랜드의 거부”라고 말했다.

리오 버라드커 아일랜드 총리가 낙태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헌법 조항의 폐지를 두고 치러진 국민투표 결과를 26일(현지시간) 발표하고 있다. 더블린|AP연합뉴스

리오 버라드커 아일랜드 총리가 낙태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헌법 조항의 폐지를 두고 치러진 국민투표 결과를 26일(현지시간) 발표하고 있다. 더블린|AP연합뉴스

아일랜드 정부는 빠른 시일 내에 개정안을 마련해 하원에 제출하고 올해 말까지 법 개정을 마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아일랜드 여성들은 임신 12주까지 자유롭게 임신중절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중절 수술 전 사흘간 시간을 두고 한번 더 고민할 수 있도록 하고, 의료진이 종교적 신념에 따라 다른 의사에게 환자를 소개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도 포함될 예정이다.

BBC는 이번 투표가 보수적인 아일랜드가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신호라고 분석했다. 아일랜드는 앞서 2015년 세계 최초로 국민투표를 통해 동성결혼을 합법화했고 지난해에는 동성애자인 버라드커가 총리직에 올랐다.

사회 전반을 지배했던 가톨릭의 영향력도 지난 10년간 꾸준히 줄어왔다. 1983년 8차 헌법 개정안 통과 당시 아일랜드인 80~90%가 주간 미사에 참석했지만 현재 20~30%로 떨어졌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부 사제들이 아동을 성추행한 사실이 잇따라 밝혀지며 가톨릭에 대한 신뢰 또한 떨어졌다. 아일랜드 가톨릭 교계도 이 같은 분위기를 의식해 이번 국민투표에 대해 목소리 내기를 자제했다.

이번 투표가 아일랜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아일랜드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북아일랜드는 어떤 경우에도 낙태를 금지한다. 몰타와 함께 유럽에서 낙태금지가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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