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들을 쓰지 말아야 했다

2019.06.25 20:39 입력 2019.06.29 17:30 수정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1293억5175만원 규모의 대법원 전자법정 입찰비리는 경향신문이 지난해 시작한 탐사보도로 드러났다. 법원행정처가 이곳 출신 업자와 짜고 17만원짜리 영상·음향 장비를 225만원에 사들이는 등 비리를 저지르면서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달 서울중앙지법 1심 판결은 언론보도로 수사가 시작됐다고 밝혔고, 지난 1월 서울중앙지검이 제출한 증거목록 가장 앞에도 경향신문 기사들이 있다. 지난해 여름 경향신문 보도가 시작되자 김명수 대법원은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는 허위자료를 언론사에 돌렸다. 당시 정재헌 전산정보관리국장이 지휘해 박진웅 공보관이 배포한 것으로 김흥준 윤리감사관의 부실감사와도 관련이 있다.

[이범준의 저스티스]이 기사들을 쓰지 말아야 했다

허위자료를 만든 전산정보관리국 직원들은 1심 판결에서 징역 10년 등을 선고받았다. 송인권 재판장은 “이 사건 범행이 (중략) 언론보도를 통해 불거지자 피고인은 진실을 숨기고 수사에 대비하기 위해 관련자들과 진술을 맞추려는 시도까지 하였고, 법원 자체 조사나 수사 과정에서 계속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으로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였으며, 이 법정에 이르러서도 최종 공판기일 직전까지 계속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주범인 강한수 전산정보관리국 정보화지원과장에게 징역 10년과 벌금 7억2000만원을 선고했다. 손창우 사이버안전과장 등에게도 징역 10년과 벌금 5억2000만원 등을 선고했다.

전자법정 비리 탐사보도는 대법원 주류들과의 싸움이었다. 경향신문 보도가 한창이던 지난해 가을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들까지 속인 그들이다.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작년 대법원 국정감사에서 (오스트리아산 초고가 실물화상기가 불가피하다고) 시연회까지 했고, 당시 저도 꼭 필요하고 문제가 없다고 동의해줬는데 그런 제 자신이 부끄러워서 이렇게 (전산정보관리국 판사들을 징계하라고) 말하고 있다”고 최근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말했다. 비리가 저질러진 10년 동안 전산정보관리국 책임자이던 판사는 14명이다. 역대 국장은 이정석, 최창영, 이영훈, 정재헌 판사이고, 심의관은 기우종, 이정환, 원호신, 고범석, 이태웅, 이은상, 임영철, 이상엽, 장정환, 유동균 판사다.

사법권력보다 상대하기 힘든 상대는 전산지식을 가진 기술관료다. 전산정보관리국 책임자이던 판사는 경향신문 취재에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답했다. 책임자의 변명치고는 구차하지만 일말의 진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법원 기술관료들이 시민세금을 업체로 빼돌리고 이를 뇌물로 되받아먹는 동안 시비를 가리는 전문가인 판사들도 당하고 있었다(물론 이는 직무유기이며 형법 제122조가 정한 죄이다). 이러한 대법원 전자법정 비리가 세상에 드러나고 법정에서 확인된 배경에는 부조리를 바로잡으려 자신과 가족의 불행까지 감수한 내부 제보자가 있다.

제보는 지난해 초여름에 받았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분야였기에 내용을 이해하고 반론을 해소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제보자를 두 차례 만나 설명을 들었고 다른 루트를 통해서도 내용이 진실한지 검증했다. 수많은 e메일과 전화로 제보자에게 내용을 묻고 확인했다. 이 모든 과정을 제보자는 묵묵히 견뎠다. 기사화를 앞두고 그에게 말했다. “취재원 보호는 내 목숨과도 같다. 제보 의도는 중요하지 않고 묻지도 않겠다. 하지만 어떻게든 제보자가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제보 사실이 드러나고 업계에서 매장될 수 있다”며 신중히 생각하라고 했다. 그는 진실이 밝혀지길 원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대법, 행정처 퇴직자에 243억 ‘입찰 특혜’ 의혹”이라는 첫 보도가 8월13일자에 나갔다. 김명수 대법원은 빤한 거짓말을 했다. “전자법정 사업을 수주한 드림아이씨티가 (중략) 전직 전산공무원이 관여되어 있는지 여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음.” 이유는 김명수 대법원장 치적용 사업인 스마트법원 4.0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장 임기 마지막 해인 2023년 완성을 목표로 국가예산 3054억원을 쓰려 했다. 이 사업 책임자 정재헌 전산정보관리국장은 김명수 대법원장 인사청문회를 준비한 대법원장 복심이다. 그들의 거짓말을 밝혀내는 데도 제보자가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그가 없었다면 전자법정 비리는 대법원의 허위해명에 묻혔을 것이다.

제보자는 징역 2년 실형을 지난 13일 선고받았다. 그는 전자법정 입찰비리를 저지른 업체의 직원이었다. “지시 내지 승인하에 이 사건 각 범행을 저지른 측면은 없지 아니하나 (중략) 담당한 구체적인 역할에 비추어보면 (중략) 가담 정도는 절대 가볍지 아니하다”는 이유다. 그러면서도 재판부는 “전자법정 관련 법원 사업의 입찰비리에 대하여 처음으로 언론에 제보함으로써 이 사건 입찰비리 및 뇌물 범죄의 전모가 드러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밝혔다. 이번 일로 제보자를 포함해 15명이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전산정보관리국 판사는 단 한 사람 징계조차 받지 않았다. 이 기사들을 쓰지 말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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