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청원 패밀리

2013.10.07 21:46

70세 아버지는 ‘차떼기 사건’과 ‘친박연대 공천헌금 사건’으로 두 차례 구속됐다.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사면 복권됐다. 35세 아들은 국무총리실에 4급 별정직 비서직으로 채용됐다. 별도의 채용공고는 없었다. 4급은 행정고시에 합격해 5급으로 임용돼도 평균 8년9개월(안전행정부 통계)이 걸려야 오를 수 있는 자리다. 총리실은 “채용기준에 따라 적법하게 처리됐다”고 했다. 42세 딸은 모 제분회사 집안의 며느리다. 귀부인은 자식 사랑이 지나쳤다. 서류를 위조해 아이를 외국인학교에 부정입학시켰다가 불구속 기소됐다.

‘스·펙·터·클’하다. 평범한 가정에서는 한 가지도 경험하기 어려운 사건들을 이 집 식구들은 빠짐없이 겪었다. 새누리당이 경기 화성갑 국회의원 보궐선거 후보로 공천한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 집안 얘기다. ‘채동욱 사태’로 익히 알려진 박근혜 정권의 도덕적 기준에 비춰보면 서 전 대표는 공천불가 대상이다. 당규상 하자가 있느니 없느니 따졌다가는 모양이 우스워진다. 혼외 아들을 뒀을지 모른다는 ‘정황’만으로 검찰총장을 찍어낼 만큼 공직(후보)자의 도덕성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정권 아닌가.

[경향의 눈]서청원 패밀리

여기서 서 전 대표의 공천 취소나 자진사퇴를 촉구할 생각은 없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서청원 패밀리’의 생활방식이다. 이 ‘문제적 가족’의 생활방식은 사실 한국 주류 기득권층의 상당수가 영위해온 그것과 다르지 않을 터이다. 서 전 대표의 아들과 딸은 “왜 나만 갖고 그래” 할지 모른다. 만년까지 정치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아버지를 원망할 수도 있겠다. 서 전 대표가 조용한 노후를 택했다면 자녀들의 개인사가 인구에 회자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헌법 제11조 제2항은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돈과 힘, 네트워크를 가진 이들은 헌법 조항 따위엔 신경쓰지 않는다. 재벌과 정치인, 고위공직자들은 혈연·지연·학연·혼맥 등을 매개로 ‘한국판 카스트’를 구축하고 있다. 의사와 법조인, 대학교수 같은 전문가 집단은 이 카스트를 견고하게 떠받치는 구실을 한다. 필부필부들은 분노하고 좌절하면서도, 자신이 못 들어간 카스트의 성채 안에 아들딸이라도 밀어넣으려 기를 쓴다. 그러나 헛수고다. 시간이 갈수록 성채는 물샐 틈 없이 단단해지고 진입장벽은 높아만 간다.

카스트 맨 윗부분의 풍경은 어떨까. 언론에 보도된 사건만 일별해도 사례는 차고 넘친다. 대표적인 것들만 뽑아봤다.

#모 전직 의대 학장 가족 = 아들은 아버지가 학장으로 재직 중인 학교의 의학전문대학원에 들어갔다. 입학 과정에 의혹이 제기됐다. 아버지가 지도한 타인의 학위논문을 아들이 표절했고, 그 실적을 인정받아 입학했다는 것이다. 연구윤리 위반 및 부정입학 논란이 확산되자 아버지는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아들도 자퇴했다.

#모 제분회사 회장 가족 = 사모님은 판사 사위가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했다. 죄없는 사위의 이종사촌 여동생을 불륜 상대로 지목하더니 청부살인까지 저질렀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형집행정지를 연장해가며 병원 특실에서 호의호식했다. 회장님은 아내를 위해 돈 주고 허위진단서를 발급받았다가 옥살이를 하는 처지가 됐다.

#모 전직 장관 가족 = 아버지가 장관으로 있는 부처의 5급 특채에 딸이 응시했다. 충성스러운 공무원들은 장관 딸에게 유리하도록 응모자격을 완화하고 전형일정을 조정해줬다. 맞춤형 특혜가 드러나자 아버지는 사임했다. 현대판 ‘음서’(고려시대의 특권적 채용제도) 논란은 온 국민의 한국사 이해를 높이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들만의 리그’가 무서운 까닭은 사실을 부인하거나 거짓말로 악다구니를 부리는 데 있지 않다. 쿨하게 인정하면서도 겁을 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서 전 대표 측은 딸의 기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출가한 딸의 문제이지만, 국민에게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다.” 앞서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7월23일 국무회의에서 “외국인학교에 가기 위해 영주권을 구입하는 등의 편법과 부정이 이어지고 있다. 교육 관련 부처는 이런 부정행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검토해 근본적으로 대책을 마련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대통령이 강도높게 비판한 사안에 딸이 연루됐는데도 ‘출가외인’이라는 조선시대 스타일 해명으로 갈음하다니, 배짱이 대단하지 않은가.

화성갑 유권자들에게 죄송한 얘기를 해야겠다. 나는 서 전 대표의 공천 취소나 출마 포기 같은 사태가 없기를 바란다. 서 전 대표의 출마는 합법과 불법, 관행과 편법, 관용과 온정주의, 상부상조와 짬짜미의 경계를 교묘하게 넘나드는 일부 기득권층의 맨얼굴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들의 실체를 똑똑히 보아두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나. 그들만의 리그에 구멍을 내는 일은 다음 문제다. (선거는 이래서 유용한 제도다. 어쨌든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